사랑은 결핍과 풍요 사이에서 태어난다
9 to 6 직장인을 위한 고전 읽기 02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이번 브런치부터 저는 공손히 경어를 쓰기로 했습니다. ^^)
플라톤(BC427~ BC347)의 <향연>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서양 고전입니다. 제가 보기에 플라톤은 철학자라가 보다는 천재적인 드라마 작가입니다. 그의 드라마 속에는 시기와 질투가 있고 사랑과 증오가 있으며 막장과 엽기도 있습니다. 플라톤의 대화 편중 <향연>은 으뜸이라 생각합니다. <향연>은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에 대한 그리스 신사들의 대답입니다. 아가톤이라는 시인의 시인대회 우승 기념 파티에서 벌어지는 일을 담고 있습니다. 등장인물은 다음과 같아요.
1. 소크라테스 BC 470-399 이 드라마의 주인공
2. 알키비아데스 BC 450-404 귀족 정치가, 장군, 소크라테스의 연인
3. 아가톤 BC 445-400 비극 시인, 잔치를 연 주인공
4. 파우사니아스 생몰연도 미상? -아가톤의 연인
5. 파이드로스 BC444-393 신경 쇠약에 걸린 작가
6. 에릭시마코스 BC 433-? 희극 시인
7. 아리스토파네스 BC 445-385 희극 시인
이중에서 주목해야 할 사람이 알키비아데스입니다. 나중에 등장해서 파티를 깽판 놓으면서 드라마를 막장으로 끌고 가거든요. 사실 요 대목이 압권인데 거기 까지 가려면 앞 사람들의 지루한 사랑 논쟁을 들어야 해요.
그리고 아가톤을 주목해 주세요. 아가톤-소크라테스-알키비아데스 사이에 묘한 삼각 관계가 성립하니까요.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장년의 귀족 남자가 10대 소년을 사랑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일종의 스승-제자 관계이면서 후원자-후원 받는 자의 사이였어요.그럼 소크라테스가 동성애자 였나? 맞습니다. 동성애자였습니다. 그것도 젊고 잘 생긴 청년들을 후리는 굉장한 선수였습니다. 아니, 그럼 우리가 여태 동성애자를 인류의 스승으로 떠받들고 있었단 말인가....라고 분개하는 분도 있는데, 사랑 또는 성애는 취향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억압의 한 종류일 뿐입니다. 이런 사랑은 옳고 저런 사랑은 틀리고, 이성애는 맞고 동성애는 아니고....는 성립이 안 됩니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는 가장 고귀한 사랑의 형태를 ‘장년 남자- 청소년 남자’ 짝이라고 여겼어요.
위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전날 있었던 아가톤의 시인대회 우승 축하연에 참가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가서 보니 사람들이 “오늘은 뭐할까?” 하고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전날 다 꽐라가 될 정도로 과음을 했기 때문에 오늘은 절대 술을 마시지 말고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연설을 하자고 해요. (그래 놓고 결국 이 사람들 또 술을 마셔요. 하여간 2,500 년 전 그리스나 지금 한국이나 남자들은 다 똑같아요. 아침에는 ‘오늘은 금주닷!’이라고 맹세하고 저녁 무렵에는 하이에나처럼 술집을 찾아 어슬렁거립니다....)
저녁 무렵 향연의 막이 오를 때, 소크라테스가 아가톤 집에 도착합니다. 아가톤은 젊은 귀족이자 시인인데 멋쟁이입니다. 그 자신에게 나이든 연인이 있지만 소크라테스를 흠모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아가톤 집에 오는 길에 남의 집 문 앞에서 잠시 명상을 하다가 옵니다. 이런 그를 맞이하는 장면입니다.
아가톤(말석에 혼자 기대고 있다가)- 선생님, 제 곁으로 와서 누우세요. 선생님 몸에 제 몸이 닿아, 선생님 머리에 떠오른 지혜로운 생각을 나눠가졌으면 좋겠어요. 분명 뭔가 또 대단한 걸 깨달으셨겠지요? 아니면 여기 오기 전에 잠시 멈추지 않으셨을 테니까.
소크라테스(아가톤 옆에 앉으면서)- 우리가 서로 만지기만 해도 지혜란 게 충만한 사람에게서 모자란 사람에게 흘러간다면 얼마나 좋겠나? 그렇다면야 기꺼이 자네 옆 자리를 차지하겠네. 자네의 풍요로운 지혜로 내가 채워질 수 있게 말일세. 내 지혜라는 건 보잘 것 없어. 하지만 자네의 지혜는 눈이 부실 정도라네. 엊그제만 해도 3만 명의 청중 앞에서 자네의 지혜가 빛을 발하지 않았나!
야, 이 두 사람 썸타는 것 좀 보세요. 아가톤이 뻐꾸기를 날리니 소크라테스가 능청스럽게 아가톤을 추켜세워 줍니다. 저는 이런 게 완역본의 즐거움이라고 봅니다. 이런 대목을 만나면 너무너무 재미있어요. 사실 <향연>에서 등장인물들이 사랑에 대해 늘어놓는 사변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소크라테스와 아가톤,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 아가톤과 알키비아데스 사이의 불꽃 튀는 대화가 실은 <향연>의 꽃이지요.
이토록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책을, 고전 연구자들이나 학자들이 늘 그렇듯이, 이런 식으로 해설을 해 놓지요.
“소크라테스와 그리스 귀족들이 사랑이라는 주제를 두고 나눈 철학적 담론.”
분명 저 따위 해석을 한 작자들은 평생 뜨거운 사랑 한 번 못해 본 게 분명합니다. 자, 그러거나 말거나 2400년 전 소크라테스 선생이 자기가 맘에 드는 상대에게 어떻게 작업을 하는 지 살펴보도록 하자고요. 사랑받고자 하는 사람은 칭찬에 약하지요. 선수 소크라테스가 젊고 아름다운 아가톤을 한껏 칭찬합니다. 소크라테스가 앉자 일단 아가톤은 식사를 권합니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나자 에릭시마코스가 “사랑의 신에 대해 돌아가며 찬미하자”고 제안합니다. 말하자면 사랑에 대해 연설하자는 겁니다.
파이드로스가 제일 먼저 말해요. 이 사람은 사랑지상주의자입니다. 사람의 행복 중에 “애정의 대상을 갖는 게 최고”라고 합니다. 다음으로 파우사니아스가 “덕으로 사랑할 것”이라고 조언합니다. 그 후에 에릭시마코스는 “사랑은 전능한 힘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고 아리스토파네스는 “사랑은 전생의 반쪽을 찾는 행위”라고 말합니다. 다음은 아가톤이 나와서 사랑의 신이면서 사랑 그자체인 에로스를 찬양합니다. 에로스는 신중에 가장 젊고 노년을 싫어하며 청년과 벗하길 좋아한다고 말해요.
아가톤의 연설이 끝나고 이제 소크라테스 차례가 됩니다. 그런데 이 양반 좀 봐요. 자기 연설을 하기 전에 또 아가톤 칭찬을 해요. “아가톤 다음 내 차례라니! 그렇게 아름답고 변화가 풍부한 연설을 들은 다음에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특히 끝 부분은 너무 아름다워서 듣는 사람 모두 압도될 지경이었어!” 뭐 이러면서 뻐꾹뻐꾹합니다. 아 놔.....대단히 훌륭한 선수입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얼마 전에 디오티마라는 현명한 여인을 만났는데 그녀가 깨우쳐 줬다면서 사랑에 대한 연설을 시작합니다.
에로스는 풍요의 신과 궁핍의 여신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이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많은 사람이 알고 있듯이 민감하고 아름답기는커녕 늘 가난합니다. 피부는 거칠고 집도 절도 없지요. 노숙도 마다않고 아무데서나 잡니다. 어머니를 닮아 항상 고통 속을 헤매지요. 그는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풍요로울 때는 한 순간 활짝 피어난 듯 생기가 넘치다가도 다음 순간 죽을 것처럼 시들해 집니다. 채워질 때가 있으면 비워질 때도 있는 법, 사랑이란 그러므로 언제나 풍족하고 동시에 언제나 부족한 것이랍니다.
놀라운 통찰력입니다. 사랑이 풍요와 가난의 아들이라니. 그래요. 우리는 사랑할 때 한없이 부자가 된 것 같습니다. 그와 함께 있을 때는. 그러다 바로 한없이 가난한 노숙자처럼 느껴지지요. 그와 헤어지면. 그와 사랑을 하고 있는 순간에도 혹시나 나를 버리지 않을까, 나를 미워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늘 굶주려 있습니다. 그러다 그가 미소라도 한 번 지으면 우린 세상을 다 얻은 듯 한 마음이 됩니다. 그러니 사랑은 진정 포로스와 페니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입니까.
소크라테스가 연설을 마치자 박수가 터져 나옵니다. 이때 밖이 소란스러워지면서 문제의 인물-알키비아데스가 등장합니다. 사람들은 알키비아데스에게 사랑에 대한 연설을 하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알키비아데스의 놀라운 반전이 시작됩니다. “나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연설을 하겠다”고 말해요. 와, 저는 이 장면 보고 깜짝 놀랐어요. 왜냐? 알키비아데스는 지금 소크라테스를 사랑하고 있어요. 알키비아데스에게는 ‘사랑이란=소크라테스’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여러분도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을 때 누가 사랑이 뭐냐? 고 물어 보면 추상적 사랑의 관념보다는 현재 여러분이 사랑하고 있는 대상에 대해 말하고 싶을 겁니다. 실존이 본질에 앞서는 거죠. 저한테 물어 보세요. 사랑이 뭔지. 저는 김태희라고 답할 겁니다. 참, 비가 있었지.....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를 비난하기도 하고 칭찬하기도 합니다. 그 변덕이 사랑일지도 모르지요. 알키비아데스는 두 사람이 함께 참전했던 포티다이아 전투에 대해 이야기하지요. 여길 보면 소크라테스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요.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알키비아데스의 두상
이 전쟁에 우리는 같이 출정해 생활을 함께 했습니다. 아, 진실로 어려움을 견디는 데 소크라테스만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우리가 포위되어 식량 없이 며칠을 지낸 적이 있는데 이 분은 어느 누구보다 잘 참았습니다. 그러다가 음식이 많고 재미있게 지낼 때가 오면 이 분은 또 어느 누구보다 그걸 즐길 줄 알았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술을 좋아하진 않아도 권하면 아무도 당할 수 없을 만큼 잘 마십니다. 그는 아무리 추워도 외투 하나만 걸치고 맨발로 지냈습니다.
이렇게 말을 마친 알키비아데스는 아가톤을 쳐다보면서 말합니다.
“알고 보니 소크라테스는 나한테만 잘해 준 게 아니야. 글라우콘의 아들 카르미데스한테도 그랬고 에우티데모스한테도 그랬고 또 누구누구한테도 똑같이 잘 해 줬어. 그러니까 아가톤, 이 사람에게 속지 말라고! 너도 언젠가는 버림받는다고!”
야, 누가 여자를 질투의 화신이라 했나요? 남자의 질투도 대단하지요? 이쯤 되면 웬만한 막장 드라마 저리가라입니다. 아마도 이때 소크라테스의 연정은 알키비아데스를 떠나 아가톤에게 옮겨 가고 있는 중이었나 봅니다. 알키비아데스에게는 이미 싫증이 난 상태였지요. 한 마디로 알키비아데스는 지는 해였고, 아가톤은 알키비아데스보다 다섯 살 어린 뜨는 해 였습니다. 말을 마치고 보니 소크라테스가 아가톤 옆에 앉아 히히덕거럽니다. 알키비아데스는 삐져서 나가버립니다.
대박이지요? 너무너무 재미있지 않나요? 저만 그런 건가요? 그 이후 남은 사람들은 또 술을 마시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지요. 아쉽게도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한 연설을 빙자로 한 알키비아데스-소크라테스-아가톤의 삼각관계 막장 드라마’는 이렇게 막을 내려요. 이런 책을 읽고 그 재미를 알게 되면 텔레비전에서 하는 막장 드라마 따위는 볼 수가 없어요. 재미없어서.
관련 책 <짧고 굵은 고전 읽기>(비즈니스북스) http://durl.kr/abp87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