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나에선 모두 호구이니라 vol 1

출퇴근하는 자유인의 쿠바 여행기

by 나자몽

Day1. 아바나


까삐똘리오 … 오비스뽀가 … 암보스 문도스 호텔 … 쿠바 미술관 혁명광장 … 호텔 리브레 … 호텔 잉글라테라 라 플로리디따



첫날아침.JPG 첫날 아침, 숙소 발코니에서 본 바깥 풍경


아바나에서의 첫날이 밝았다.


넘치는 햇볕과 까삐똘리오가 내다보이는 숙소. 여행의 기대감은 한껏 부풀었다. 어디서 비롯된 건지 알 수 없는 여유롭고 낭만적인 공기가 숙소의 옥색 발코니를 통해 흘러들었다. 쿠바행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고, 여행을 준비할 때부터 잔뜩 기대했던 그런 공기였다. 여유와 낭만의 공기가 시작되는 그 지점을 찾아서 아바나의 거리로 나섰다. 환상으로 가득한 여행의 첫발이었다.


오비스뽀가 입구.jpg 오비스뽀가 입구

발이 닿는 대로 걸어 여행객들이 모여든다는 오비스뽀가에 들어섰다. 오비스뽀가에는 기념품 가게가 줄지어 있었고, 라이브 공연이 끊기지 않는 식당이 있었으며, AK소총을 찬 경찰들이 돈을 걷어가는 환전소가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쿠바 여행자들에게 필수품인 와이파이 카드를 판매하는 에텍사(ETECSA · 쿠바의 국영 통신사)가 있었다. 참고로 데이터 서비스도, 로밍도 녹록치 않은 쿠바에서 인터넷을 사용하려면, 에텍사나 호텔에서 와이파이 카드를 구입해(1시간당 1CUC, 길거리의 호객꾼에게 바가지를 쓰면 2~3CUC) 와이파이가 터지는 구역을 찾아간 뒤, 카드 번호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인내심을 유지해야 한다.(와이파이가 그리 빠르지 않을 뿐더러 가끔 카드에 문제가 있을 때가 있다.) 지독히 번거로운 절차지만 , 여행을 시작할 때라 이런 종류의 불편함쯤은 낭만적으로 느껴졌다.(비록 함께 여행한 여자친구는 질색했지만...)


오비스뽀의 환전소 앞, 돈 걷으러 온 경찰들 일 마치기를 기다리며(오른쪽이 경찰의 현금수송차, 경찰은 무서워서 찍을 수가...)


오비스뽀가=관광객에게 삥(?) 뜯는 거리

오비스뽀가에선 쿠바 특유의 정서를 언뜻언뜻 엿볼 수 있었지만, 기대했던 모습은 아니었다. 여유롭기보다는 분주했고, 낭만적이라기보단 치열했다. 온갖 나라의 관광객들을 상대하느라 뻔뻔하게 단련된 현지의 호객꾼들은 걸음을 하나 옮길 때마다 흥정을 붙여왔다. 그때마다 애써 무시하느라, 때로는 실랑이를 벌이느라 진을 뺐다. 시간이 지날수록 오랜 기간 머릿속에 차곡차곡 채워 온 쿠바에 대한 환상이, 고장난 수도꼭지 아래로 물이 빠져나가듯 빠져나갔고, 그 빈 자리는 현지인을 향한 경계심으로 차올랐다.


"올라(안녕?)", "부에노스 디아스(좋은 아침!)", "꼬모 에스따스(잘 지내?)" 같은 인사 대신 "택시?", "시가?" 같은 호객의 말로 안부를 묻는 건 대수롭지 않았다. 다만, 흥정에 흥정을 거듭해 20CUC에서 15CUC으로 깎은 기념품을 어느 누군가는 손쉽게 5CUC에 손에 넣을 때, 현지인에겐 2CUP짜리 음식이 나에게로 와 2CUC이 될 때,(쿠바는 CUC과 CUP 두 가지 화폐를 쓰는데, CUC은 외국인들이 쓰는 화폐로 주로 현지인들이 쓰는 CUP보다 24배 가치가 있다. 즉, 1CUC은 24CUP이므로, 2CUC은 48CUP...) 다짜고짜 흥겨운 음악을 연주하더니 빛의 속도로 수금통을 내밀 때, 실수인 척, 잔돈 없는 척 뻔한 연기를 펼치며 거스름 돈을 내주지 않을 때는 여간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당황스러움 때문에, 현지인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앞만 보고 걷는, 20시간을 날아 온 여행자답지 않은 태도가 오비스뽀가를 여행하는 방식이 되었다.


DSC08894.JPG 어느 호텔 앞, 수금하는 공연단

한참을 걸어 호객꾼들도 조금은 잠잠해지는 곳에 낯익은 건물 하나가 눈에 띄었다. 출발 전, 여행기에서 수없이 봤던 건물로, 헤밍웨이가 머물렀다고 해서 유명한 암보스 문도스 호텔이었다. 분홍색 페인트를 새로 칠한 외관에는 쿠바다운 화려한 색감과 쿠바답지 않은 깔끔한 붓터치가 은근히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었다.


호텔 내부에 들어가 헤밍웨이의 흔적을 감상하기 위해선 1인당 5CUC의 입장료를 지불해야 한다고 했다.(쿠바 아바나에는 공짜가 없다. 적어도 외국인에겐.) 헤밍웨이의 이름값과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관광지 중 하나인 점을 고려하면, 그리 비싼 비용은 아니었으나,(쿠바의 평범한 직장인이 한 달에 30~40CUC을 받는다고 하니 따지고 보면 작은 돈도 아니긴 하다.) 오비스뽀가를 '관광객을 상대로 삥(?)을 뜯는 거리'라고 나름 정의할 만큼 피해의식과 경계심에 절어 있는 상태였던 터라 별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고,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가 중요하지, 헤밍웨이가 어디서 '노인과 바다'를 썼는지가 뭐가 중요하겠는가.(라고 약간의 아쉬움을 합리화로 달랜다.) 아무튼 그러한 이유들로, 호텔 입구에서 돈 들지 않는 사진이나 잔뜩 찍다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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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보스 문도스 호텔 입구, 색감과 발코니가 예쁘긴 하다


현실에 맞춰 믿음을 바꿔가지 않으면 '여행은 재난'이 된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첫날 오비스뽀가를 여행하던 모습은 '호구'라 할 만했다. 여행 전까지 믿고 있던 환상 속 쿠바에 집착하느라 정작 현실의 쿠바는 즐기지 못했으니, 호구라는 단어 아니고선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쿠바에 가기 위해 쏟아부은 연차와 돈, 20시간의 비행까지 생각한다면, 호구 중에 상호구인 셈이다.


쿠바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찾아 읽은 <여행의 이유(김영하)>(앞으로 자주 언급하게 될 것 같다.)에는 여행지에서 반드시 버려야 할 태도로 '현실보다 믿음을 우선하는 태도'가 언급된다. 눈앞에 나타나는 현실에 맞춰 믿음을 바꿔가지 않으면, '여행은 재난'이 되고 만다고 말이다. 결국,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많은 이유 중에는 스스로가 가지고 있던 현실과 다른 믿음을 바로 잡기 위한 것도 포함되지 않을까 싶다.


자신이 믿고 있던 것들이 아직은 건재하리라는 희망. 현실보다 믿음을 우선하는 태도였다. 여행하지 않는 사람은 편안한 믿음 속에서 안온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여행을 떠난 이상, 여행자는 눈앞에 나타나는 현실에 맞춰 믿음을 바꿔가게 된다. 하지만 만약 우리의 정신이 현실을 부정하고 과거의 믿음에 집착한다면 여행은 재난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
- p.35, 추방과 멀미, 여행의 이유(김영하)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오비스뽀가의 끝에 다다를 즈음 조금은 달라졌다. 그땐 몰랐지만, 어쩌면 그 시점부터 스스로도 어렴풋하게나마 뭔가를 깨달았던 것 같다.(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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