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포티는 남자만 존재한다

― 젊음을 욕망할 권리에 대하여

by 라캉트

그들은 아직 유효하다

요즘 SNS에서 ‘영포티(Young Forty)’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젊은 취향을 가진 40대 남성, 조던을 신고 크리드 향수를 뿌리며,

‘요즘 애들’보다 더 요즘처럼 보이려 애쓰는 남자들.


그들은 흔히 ‘중년 꼰대’라 불린다.

한때는 자기 관리의 상징이었지만,

지금은 젊음을 연기하는 피로한 몸의 은유가 되었다.

화면 캡처 2025-11-11 182415.png 염따의 영포티 패러디 룩

최근에는 래퍼 염따가 ‘영포티형’ 룩을 패러디하며

이 밈이 단순한 유머가 아니라 중년 남성 소비문화에 대한 풍자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줬다.

나는 아직 유효하다.

이 짧은 문장이 영포티의 세계를 지배한다.



부끄러움이 없는 세대

영포티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부끄러움의 결여’다.

그들은 욕망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몸을 드러내고, 젊은 문화를 소비하며,

“40대도 이렇게 살 수 있다”라고 선언한다.


하지만 그들의 욕망은 더 이상 개인의 것이 아니다.

그건 자본이 번역한 욕망이다.


운동, 재테크, 명품, 스페셜티 커피 —

모두가 ‘갱년기의 기호학’으로 작동한다.

01.41794977.1.jpg 온라인 커뮤니티 영포티 밈


실제로 아이폰 17, 슈프림, 스톤아일랜드, 우영미 같은 브랜드들이

이 ‘영포티’ 밈의 아이콘이 되었다.


젊음과 혁신의 상징이던 기호들이 이제는 중년의 과시템으로 전락했고,

“부장님이 들고 다니는 순간 사고 싶지 않다”는 댓글이 유행처럼 번진다.


그들은 불안을 소비로 덮으며,

늙음의 공포를 완벽히 사회화했다.



그런데, 여성은 어디에 있는가

이쯤 되면 질문이 생긴다.

왜 아무도 40대 여성을 ‘영포티’라 부르지 않는가?


그녀가 요가를 하고 러닝화 대신 하이힐을 신는다 해도

그건 ‘동안 관리’나 ‘자기 계발’로 호명될 뿐이다.

여성의 젊음은 여전히 윤리의 언어로 통제된다.


남성이 욕망을 드러내면 ‘솔직하다’고 하고,

여성이 욕망을 드러내면 ‘불편하다’고 말한다.


그렇다.

‘영포티’는 남자만 존재한다.

여성의 욕망은 여전히 제도 바깥에 머문다.



욕망의 젠더, 부끄러움의 정치학

남성의 욕망은 사회적 성취로 보상받고,

여성의 욕망은 도덕의 잣대로 심판받는다.


라캉의 말대로 ‘대타자의 시선’은 여전히 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다.

여성은 그 시선 아래서 보이는 자에 머물고,

욕망하는 주체로 말할 수 없다.


그녀가 젊음을 욕망하면 그건 ‘불안’으로 읽히고,

그가 젊음을 욕망하면 그건 ‘자신감’으로 찬양된다.

이 얼마나 정교한 위선인가.



부끄러움을 되찾는 일

나는 오히려 ‘부끄러움’을 복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끄러움은 욕망의 윤리를 만든다.


자신이 타자의 욕망을 얼마나 내면화했는지,

스스로를 얼마나 상품화했는지 깨닫는 순간에 비로소 온다.


‘중년 꼰대’의 세계에는 그 부끄러움이 없다.

그래서 그들의 젊음은 공허하다.


그건 욕망의 모방이지, 삶의 변주가 아니다.

진짜 젊음은 욕망을 말할 수 있는 용기다.


그게 부끄러움의 다른 이름이다.



젊음을 욕망할 자유는

부끄러움을 감수할 용기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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