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수 없었던 상처를 건너는 법

영화 <월플라워>

by 라캉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넷플릭스에서 〈월플라워〉를 보고 나자, 오래전 내가 사랑했던 또 다른 영화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 두 영화는 시대도, 분위기도, 장르도 다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비슷한 ‘공기’를 공유한다. 세 명의 아웃사이더, 문화에 대한 과잉 동일시, 그리고 성적 통과의례라는 공기.


〈몽상가들〉에서 주인공들은 영화를 문자 그대로 “신체 안으로 먹어 치우려는” 청년들이다. 시네필이 되는 것은 철학적 탐구가 아니라, 과거로 도피하고 퇴행하기 위한 장치로 등장한다. 영화는 그들을 구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베르톨루치는 그들을 ‘길 잃은 미성년자’로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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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월플라워〉는 비슷한 구조에서 정반대의 길로 나아간다. 이 영화 역시 ‘문화’를 중독처럼 소비하는 소년소녀로 가득하지만, 영화는 그들에게 도피가 아닌 통과를 허락한다. 세 명의 아웃사이더가 함께 듣는 음악은 과거로 숨어들기 위한 배경음악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문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몽상가들〉은 퇴행의 문이고,
〈월플라워〉는 통과의 문이다.



말해질 수 없는 폭력, 봉합 불가능한 침묵


영화 속 찰리는 “착하고 조용한 아이”로 등장한다. 하지만 그의 침묵은 미덕이 아니라, 말할 수 없었던 폭력에 의해 강요된 침묵이다. 찰리가 가장 사랑했던 이모는 폭력의 피해자였고, 동시에 그 폭력을 찰리에게 되풀이한 가해자이기도 하다. 이모는 죽었고, 찰리의 기억은 멈춰버린다. 가해는 진행되었지만, 의미화는 중단된 것이다. (찰리의 생일과 이모의 기일은 크리스마스이다. 이보다 더 가혹할 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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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의 말대로 “기표가 봉합되지 않은 자리”는 주체의 신체에 남는다. 찰리는 자신의 몸에 새겨진 상처를 이해하지 못한 채 자라났고, 성을 인지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혼란은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찰리에게 세계는 불쾌한 질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의 중심에는 “sex”라는 이해할 수 없는 기표가 놓여 있다.



언어 대신 음악 — Bowie의 ‘Heroes’


찰리는 샘에게 묻는다.
“그 노래 제목이 뭐야?”
하지만 끝내 그 곡명을 듣지 못한다. 마치 자신의 트라우마를 말하지 못했듯이.

그러다 마지막에 드디어 제목을 듣게 된다. David Bowie – 〈Her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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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찰리는 이해가 아니라, 감각으로 세계를 다시 맞이한다.
“말해지지 않는 것을, 살아낼 수 있는 것으로 바꾸는 일.”

음악은 언어가 실패한 자리에 들어와, 봉합이 아닌 견딤의 문장을 쓴다.

We can be heroes, just for one day.


영웅이 되는 것은 미래의 장엄한 서약이 아니라, 딱 하루를 살아낼 수 있는 힘에 가깝다. 치유가 아니라 지속 가능성. 그게 이 영화가 말하는 희망의 형태다.



미국식 긍정과 ‘견딤의 미학’


〈월플라워〉는 상처를 해부하는 영화가 아니다.

상처를 끌어안고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드는 영화다.
유럽 예술영화처럼 절망에 머물지도 않고, 치유라는 달콤한 거짓말을 하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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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는 여전히 불완전하다.

상처는 남아 있고, 기억은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다만 그는 말할 수 없는 것을 견딜 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리고 그 견딤의 순간에, 그는 속삭인다.

In that moment, we are infinite.

무한하다는 것은 유리처럼 완벽한 상태가 아니라,
부서진 조각들을 안고도 세계를 향해 걷는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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