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국보>
이상일의 〈국보〉는 가부키 영화가 아니다.
그건 숭고라는 괴물에게 모든 것이 삼켜진 남자들의 이야기다.
사랑도, 가족도, 육신도 내어주면서 끝내 포기하지 못하는 어떤 형식.
그걸 숭고라 부르지 않고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영화 속 두 남자, 키쿠오와 슌스케, 그들은 서로의 연적이 아니다.
그들은 같은 신에게 몸과 시간을 바치는 두 명의 순례자다.
그리고 그 신은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
오직 형식만, 무대만, 전통만 사랑한다.
누구는 혈통으로, 누구는 육체로,
각자 다른 방식으로 몸을 바친다.
그러니 둘은 적이면서 동지이고, 증오하면서도 서로를 알아본다.
이건 관계의 드라마가 아니라, 예술이라는 신을 섬기는 두 방식의 대립이다.
슌스케는 기이하게도 혈통의 짐을 짊어진다.
그의 등에는 사라진 아버지의 그림자가 달라붙어 있다.
그 그림자는 복수를 요구하지만, 복수보다 더 무서운 것은
가문의 재현이다.
예술은 복수를 대신하는 방식으로,
그를 무대 위에 다시 태어나게 한다.
그리고 슌스케는 그 재현의 노예가 된다.
반면 키쿠오는 몸 그 자체로 예술에 항복한다.
분장이 그의 살을 벗기고,
동작이 관절을 반복적으로 갈아 넣는다.
예술은 그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허락하지 않고,
그의 다리를 가져가면서도 무대를 포기시키지 않는다.
예술은 인간에게 축복을 주지 않는다.
다만, 그를 끝내 포기하지 못하게 할 뿐이다.
〈국보〉를 보고 깨닫게 되는 것이 있다.
예술의 선택을 받는 사람은 인간에게 사랑받을 수 없다.
살아 있는 몸을 잃으면서도
그들은 무대의 그림자를 쫓는다.
가족이나 평범한 일상은
그들에게 선택지가 아니다.
그저 가능하지 않은 영역일 뿐이다.
이건 비극이 아니다.
그들이 선택한 사랑에는
슬픔보다 존엄이 있다.
영화는 구원으로 끝나지 않는다.
누구도 완성되지 않고,
잔혹하게 아름다운 무대만 남는다.
하지만 이상일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예술은 우리를 구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앞에서 무너지는 방식만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고.
그 무너짐이 존엄이 되는 순간,
인간은 예술의 노예가 아니라,
숭고에 미친 연인이 된다.
영화판에 떠도는 오랜 농담이 있다.
너는 영화 없이는 살 수 없지만, 과연 영화도 그럴까?
사실 나는 그 질문에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영화는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내 해석이 없어도 잘 돌아가고,
내 분노나 눈물 따윈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스크린은 언제나 나 없이도 완벽했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이 세계에 자꾸 걸려 넘어진다.
러닝을 하고, 고양이 칸트를 돌보고, 일상을 꾸려가다가도
어떤 장면 하나, 어떤 얼굴 하나에 다시 잡혀버린다.
그냥 바보처럼, 또 속는다.
그건 사랑이라기보다, 일종의 습관적 낭만에 가깝다.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못 버리는,
쓸데없이 오래가는 마음.
나는 그런 마음이 부끄럽기도 하고, 조금 웃기기도 하다.
그러니까 나는 대단한 예술 애호가도 씨네필도 아니다.
그저 어쩌다 감염된 사람처럼,
아직도 그 환상에 걸려 넘어지는 매우 사소한 주체일 뿐이다.
그러니 나는 계속 본다.
그리고 계속 쓴다.
사랑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미련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