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나방이 사라진 시대의 유행
최근 지상파 뉴스에 ‘두바이 쫀득 쿠키(이하 두쫀쿠)를 건강하게 먹는 법’까지 등장했다.
의사와 영양사가 나와 당 함량을 조절하라 조언하고, 하루 적정량을 제시 한다.
그 장면을 보며 나는 이 유행이 끝물에 접어들었음을 직감했다.
어떤 욕망이 관리와 조절의 대상이 되는 순간, 그 유행의 야성은 거세되기 마련이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아직 '두쫀쿠'를 먹어보지 않았다. 중동식 딜라이트 특유의 과잉된 단맛에 시큰둥한 ‘보수적인 근본주의자’의 입맛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이 유행을 소비하는 한국 사회의 태도가 못내 서글펐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여러 번의 ‘맛의 파도’를 겪었다.
대만 카스텔라를 처음 대만 단수이 노점에서 먹었을 때, 그것은 그저 싸고 크고 포근한 길거리 간식이었다.
하지만 한국에 당도한 순간, 그 카스텔라는 느닷없이 ‘고급 디저트’라는 외피를 입었다.
번역 과정에서 발생한 계급적 착시였다. 이후 조류독감(AI), 식용유 파동과 함께 거품이 꺼졌고, 영화 〈기생충〉에서 가난의 기표로 카스텔라가 언급될 때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원산지의 담백함을 잃고 과도한 의미를 뒤집어쓴 음식의 말로를 이미 여러 번 보아왔기 때문이다.
유명 학군지 논술 강사 시절, 아이들이 하도 먹기에 한번 사봤던 탕후루도 마찬가지였다.
한 입 베어 문 순간 느껴진 건 미각의 즐거움이 아니라 유행에서 소외되지 않으려는 집단적 긴장이었다.
이번 '두쫀쿠' 현상은 이전과 조금 다르다.
가장 흥미로운 건 이 유행을 대하는 공급자들의 태도다.
철물점, 초밥집, 국밥집, 카페 한구석, 본업 옆에 살짝 얹은 겸업 형태.
이제 아무도 유행에 인생을 걸지 않는다.
허니버터칩 사태 때 무리하게 공장 라인을 늘렸다가 손해를 봤던 기억 때문일까.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안다.
이 유행이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걸.
그래서 전업 대신 겸업을, 투자 대신 팝업을 선택한다.
올인하지 않고, 언제든 빠져나올 수 있는 출구를 함께 설계한다.
영리하고 합리적인 생존 전략이다.
하지만 동시에, 유행을 더 이상 믿지 않는 사회의 얼굴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제 유행을 믿지 않는다.
대신 계산한다.
얼마나 갈지,
언제 빠져나올지,
어디까지만 가야 손해가 아닌지를.
나는 한때 사랑도 일도 불나방처럼 달려들었다가 화르륵 태워버렸던 인간이다.
사회적 가면을 쓰고 살아가면서도 가슴 한구석엔 늘 타오르는 불꽃 하나를 품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유행의 한복판에서도 손실을 회피하고 건강을 챙기며 탈출로부터 계산하는 지금의 풍경이 낯설다.
지금의 사회에서 불나방은 미련한 존재다.
진심은 리스크가 되고, 몰입은 손해의 전조가 된다.
모두가 서로에게 말한다.
“너무 진지해지지 마.”
'두쫀쿠'를 사기 위해 줄을 서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이미 다음 유행을 검색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유행은 욕망의 축제가 아니라 손해 보지 않기 위한 손실 회피의 카니발에 가깝다.
나는 아마 앞으로도 누가 선물하지 않는 이상 '두쫀쿠'를 사 먹지 않을 것이다.
맛이 궁금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쿠키가 감당해야 할 서사가 너무 빤히 보이기 때문이다.
예전의 나라면 한 번쯤은 줄을 섰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그럴 기력이 없는 게 아니라, 그럴 이유를 잃었다.
누구보다 뜨거웠던 불나방이었기에, 계산기를 두드리며 유행을 소비하는 이 건조한 시대가 조금은 씁쓸하다.
우리는 언제부터 무언가에 온전히 마음을 빼앗기는 법을 이렇게 조심스럽게 잊어버렸을까.
'두쫀쿠'의 쫀득한 식감 뒤로, 진심이라는 감각이 자꾸만 딱딱하게 굳어가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