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라는 도피처가 무색해질 때

〈시라트〉가 보여준 지옥도

by 라캉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관 문을 나서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다행이다, 영화라서.

스페인 영화 〈시라트〉(2025)는 최근 내가 본 영화 중 가장 무서운 공포였다. 하지만 그 공포는 괴물이 튀어나오거나 피가 튀는 장면에서 오지 않았다. 끝을 알 수 없는 사막의 수평선, 그리고 고막을 압박하는 레이브(Rave) 음악 사이에서 내가 붙잡고 있던 이유와 의미가 하나씩 무너지는 경험에 가까웠다.


이 영화가 불러낸 전율은 깜짝 놀람이 아니라, “이 세계가 더 이상 나를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감각에서 비롯된다.



1. 맥거핀이 된 딸, 파괴된 ‘아버지’라는 정체성

주인공 루이스가 사막으로 들어가는 이유는 단순하다.
가출한 딸을 찾기 위해서다.


그러나 〈시라트〉는 이 사적인 동기를 끝까지 존중하지 않는다. 딸을 찾으려는 그의 절박함은 이야기를 앞으로 밀어 넣는 장치로만 기능할 뿐, 세계는 그 소망에 단 한 번도 응답하지 않는다. 영화는 영리하고 잔혹하게도 이 동기를 맥거핀으로 전락시킨다.

그는 딸을 찾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함께 온 어린 아들 에스테반을 잃고, 반려견을 잃고, 자동차라는 문명의 마지막 보호막마저 잃는다. 결국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더 이상 ‘아버지’로 기능하지 못하고, 그 정체성 자체를 거세당한다.


이것은 서사의 실패가 아니다. 오히려 개인의 동기가 더 이상 보호받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의도된 파괴다. 이 사막에서 가족, 책임, 윤리, 공동체는 아무런 안전망이 되지 않는다.



2. 레이브(Rave): 자유의 찬가가 아닌 재난의 마취제

사막 위에 울려 퍼지는 레이브 음악은 처음부터 기이하다.
히피 문화와 탈경계의 자유를 상징하던 비트는, 이 영화에서 전혀 다른 역할을 한다.

반복되는 비트는 사고를 멈추게 하고, 질문을 지우며, 판단을 무력화한다. 그것은 저항의 음악이 아니라, 재난에 적응하기 위해 스스로를 트랜스 상태로 몰아넣는 마취제에 가깝다.


사막의 무한한 정지와 레이브의 무한한 반복이 만나는 순간, 관객은 감각적인 질식을 경험한다. 모두가 음악에 몸을 맡긴 채 흐릿해질 때, 끝까지 ‘의미’를 붙잡으려는 아버지는 이 세계에서 가장 이질적이고, 가장 먼저 파괴될 존재가 된다.



3. 국경이 사라진 사막, 정치가 만든 ‘실재’

〈시라트〉의 사막은 자연 풍경이 아니다. 그것은 국경이 붕괴되고, 전쟁이 특정 사건이 아니라 ‘분위기’로만 감지되는 정치적 실재의 공간이다.


이 영화가 무서운 이유는 주인공이 잘못된 선택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선택은 윤리적으로 옳았고, 합리적이었으며, 인간적으로 충분히 이해 가능하다. 그러나 세계는 그 선의에 아무런 보상을 하지 않는다.


사막은 말없이 이렇게 답하는 듯하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

의미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세계에서 개인이 느끼는 공포는, 그 어떤 유령보다 실존적이다.



4. 엔딩의 피란 행렬: 우리는 이미 이 세계에 살고 있다

엔딩에 등장하는 기차와 침묵의 피란 행렬은 너무나 익숙해서 오히려 더 공포스럽다. 중동 분쟁 보도에서 수없이 반복되어 온 이미지, 뉴스에서 매일 소비되던 장면들이 은유 없이 스크린 위에 놓인다.

영화는 숨길 생각이 없다.


“이것은 상상 속의 지옥이 아니라, 당신들이 이미 살고 있는 현실이다.”


관객이 느끼는 불편함의 정체는 여기에 있다. 극장이라는 안전한 어둠 속에서 타자의 비극을 ‘공포 영화’라는 장르로 소비하려 했던 태도가 들켜버렸기 때문이다.



에필로그: 극장이 필요한 이유

오랜만에 왜 영화를 극장에서 봐야 하는지 명확해지는 경험이었다. 무한하게 이어지는 사막의 고립감을 온몸으로 견디고, 레이브 음악의 압력에 그대로 노출되는 물리적 고립. 그 고립 속에서만 우리는 비로소 깨닫는다.


내가 뱉은 “다행이다, 영화라서”라는 말은 사실 “저 지옥이 아직은 스크린 너머에 있어 다행이다”라는 비겁한 안도였다는 것을.


〈시라트〉는 위로나 해석의 출구를 제공하지 않는다. 다만 묻는다.
의미가 사라진 사막 위에서, 당신은 무엇을 붙잡고 끝까지 걸어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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