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 없는 빵을 내놓는 사회

영화 〈더 메뉴〉가 던지는 잔혹한 농담

by 라캉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동안 보려고 마음만 먹고 미뤄뒀던 영화 〈더 메뉴〉(2022)를 드디어 봤다. 셰프와 요리라는 것 빼고는 공통점이 거의 없지만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시즌2>를 보는 동안 계속 떠올랐기 때문이다.


<더 메뉴>에서 ‘빵 없는 빵’이 등장했을 때, 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이 나왔다. 접시 위에는 소스만 가지런히 플레이팅 돼 있었고, 빵은 없었다.

그건 요리라기보다 개념미술에 가까웠다. 배를 채우는 음식이 아니라, “이 상황을 이해할 자격이 당신에게 있는가”를 묻는 시험지 같았기 때문이다.

이 장면 하나로 나는 이 영화가 겨냥하는 세계를 알아봤다.

맛보다 의미를, 포만감보다 해석 능력을 앞세우는 세계.
몸은 점점 허기지는데, 말과 개념만 계속 늘어나는 세계.

그 식당에서 벌어지는 참극은 그래서 비극이라기보다, 아주 정교하게 설계된 ‘언어의 처벌’처럼 보였다.



추락해야만 하는 천사들: 엔젤 투자자의 역설

영화 속 셰프 슬로윅은 자신을 압박해 온 스폰서를 처단하며 기묘한 연출을 선보인다. 그는 자본가에게 붙여진 이름, ‘엔젤 투자자’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엔젤이라면, 하늘로 올라가야지.”

그는 은유를 해석하지 않는다. 대신 실행한다.
가짜 날개를 단 투자자가 바다로 추락하는 순간, ‘엔젤’은 말 그대로 추락한 천사(Fallen Angel)가 된다.


이 장면이 섬뜩한 이유는 이것이 자본에 대한 복수라기보다, 자본이 스스로 만들어낸 언어의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천사’의 이름 아래서 나를 갈아 넣으며 살아왔을까.
그 불균형한 관계를 신화적 제의로 완성하는 셰프의 광기는, 사실 이 시스템을 가능하게 만든 우리 모두를 향해 있다.



의미만 드세요: 빵이 사라진 식탁

슬로윅의 레스토랑에서 손님은 더 이상 음식을 즐기는 주체가 아니다.
그들은 셰프라는 큐레이터가 전시한 담론을 소비하는 관객이 된다.


빵이라는 생존의 기본값을 제거하고, 오로지 해설이 필요한 소스만 내놓는 행위는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서 “이걸 이해해야 똑똑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요구하는 현대 사회의 지식 소비 구조와 닮아 있다.


비평가는 의미를 해체하다 죽고, 미식가는 우월감을 소비하다 죽는다.

그들은 음식을 망친 자들이 아니다.
음식을 오직 언어의 유희로만 소비해 온 죗값을 치른 사람들이다.



인간 플레이팅의 의식

영화의 엔딩, 레스토랑 전체가 불타오르는 부감 쇼트는〈미드소마〉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그 순간 인간들은 더 이상 개별적인 인물이 아니다.

<미드소마>의 사랑스러운 엔딩
<더 메뉴>의 마지막 디쉬 재료

그들은 정교하게 배치된 식재료이자, 완성된 요리의 일부다.

이 장면이 잔혹하지만 이상하게 슬프지 않은 이유는, 이 학살이 논리적으로 너무 완벽하기 때문이다.

셰프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너희는 나를 평생 먹어왔고, 이제 나는 너희를 요리한다.”


이제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가 사라지고, 모두가 하나의 시스템 안에서 재료로 산화한다.

이것은 복수가 아니라, 뒤틀린 세계를 닫는 냉정한 폐점 선언에 가깝다.


치즈버거라는 구원

이 아수라장에서 유일하게 살아남는 인물은 마고다.
그녀는 해석하지 않았고, 우월감을 탐하지 않았으며, 이 시스템의 언어에 끝내 걸려들지 않았다.

그녀가 요구한 것은 단 하나였다.

“치즈버거 주세요.”

셰프가 눈물을 흘리며 패티를 굽는 장면에서, 나는 이 영화의 유일한 진심을 보았다.


그것은 요리가 타락하기 전, 주체가 대타자의 욕망에 예속되기 전의 원점이었다.

"진짜" 요리를 하던 시절의 슬로윅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최근 끝난 〈흑백요리사 2〉를 보며 나는 보지않고 미뤄뒀던 이 영화가 자꾸만 떠올랐다.
모두가 성취와 공정함을 말하지만, 정작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빵 없는 빵’의 허세가 아니라 치즈버거의 담백한 기쁨이 아닐까.


불나방처럼 자신을 태워 의미를 생산하던 셰프가 마지막으로 구원받은 이유는 단순하다.
누군가가 그의 요리를 다시 그저 음식으로 대해주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거창한 비평이 아니라, 내 앞의 접시를 정직하게 마주하는 그 단순한 감각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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