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모노우라와 <벼랑 위의 포뇨>

세계는 여전히 믿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by 라캉트

히로시마 여행을 떠나기 전, 넷플릭스에서 〈벼랑 위의 포뇨〉를 다시 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이 영화에 대한 첫 기억은 실망이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보여준 복잡하고 깊은 세계에 비하면, 영화는 지나치게 단순하고 귀엽기만 한 이야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비극을 지워버린 인어공주 이야기.

그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단순한 주제가가 흐르는 순간
나는 울고 있었다.

왜 울었는지 한동안 설명할 수 없었다.


좋아한다는 마음은 왜 이렇게 단순할까

이번에 나를 움직인 것은 이야기의 구조가 아니라, 인물들의 태도였다.

포뇨는 파도 위를 달려 소스케에게 간다.
위험한지, 가능한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좋아하니까 간다.

그 단순함이 이상하게 마음을 건드렸다.

소스케의 엄마 리사도 마찬가지였다.
요양원에서 일하며 노인들을 대하는 태도,
폭풍 속에서도 아이를 과하게 불안하게 만들지 않는 태도,
세상을 경계하기보다 아이가 세계를 믿을 수 있도록 돕는 어른.

다시 보니 이 영화는 순진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혼란 속에서도 여전히 세계를 신뢰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토모노우라, 공간에도 성격이 있다

영화의 배경이 된 히로시마의 작은 어촌 마을, 토모노우라에 도착했을 때 나는 왜 이곳이 선택되었는지 이해했다.

이곳은 특별히 아름다운 관광지는 아니다.
작고, 조용하고, 조금은 낡았다.
바다와 배와 집들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은 채 함께 늙어간다.

화려하지 않지만, 묘하게 단단하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자주 찾았다는 작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공간에는 가장 어울리는 커피였다.

할머니 사장님은 관광객을 반기지도, 밀어내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의 리듬을 지키고 있었다.

그 거리감이 좋았다.

이곳은 관광지가 아니라, 누군가의 삶이 계속되는 공간이라는 느낌.


그때 알았다.
포뇨의 세계는 판타지가 아니라,
이 마을의 정서가 조금 더 밝게 번진 것이라는 걸.


세 자매와 한 아이

이번 여행에는 세 자매와, 그리고 우리 집의 유일한 다음 세대인 조카가 함께했다.


우리는 종종 <벼랑 위의 포뇨>와 카페 사장님의 단단함과 그에 어울리는 커피 맛을 이야기를 했다.

조카는 포뇨 캐릭터 인형을 사진 찍을 때마다 적재적소에 투입시켰다.


이유는 달랐지만, 감정은 비슷했다.

서로 다른 세대가 같은 영화를 두고 같은 방향으로 웃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좋았다.

그때 깨달았다.

<벼랑 위의 포뇨>는 어린이를 위한 영화가 아니라,
서로 다른 나이의 사람들이 같은 세계를 믿을 수 있게 해주는 이야기라는 것을.


에필로그

토모노우라를 떠나며 생각했다.

어쩌면 그동안 <벼랑 위의 포뇨>가 순진했던 것이 아니라, 내가 너무 오래 세상을 의심하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


분석하고, 해석하고, 구조를 읽는 일에 익숙해지면서 맹목적으로 달려가는 마음을 그저 ‘유치하다’는 말로 밀어 두고 있었던 것 같다.


세상을 믿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몰라서 하는 낙관이 아니다.

위태로움을 알면서도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작은 마을의 고요함과
누군가를 향해 달려가는 마음을
여전히 소중하다고 선택하는 태도다.

이번 여행이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은,

나는 아직
이 세계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P.S.

1. 히로시마에 살고 있는 막내가 아니었다면, 세 자매와 한 아이가 같은 공간에서 같은 영화를 이야기하는 그 순간도 없었을 것이다.

2. [아르미안의 네 딸들]의 유명한 문구 "인생은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다."를 나는 정말 좋아한다. 우리 세 자매와 조카의 이번 여행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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