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은 없다, 오직 리브랜딩만 있을 뿐

<레이디 두아>를 보고 남은 찜찜함

by 라캉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주인공이 처절하게 무너지는 이야기를 본다.

스탕달의 인물들이 그랬고, 스탠리 큐브릭의 <배리 린든>이 그랬다.
그들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는 단순하다.


자신의 욕망을 끝까지 밀어붙였고, 그 대가를 온몸으로 치렀기 때문이다.

파국은 비겁하지 않다.
그것은 욕망의 가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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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레이디 두아>를 다 보고 난 뒤, 나는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누군가는 무너졌는데, 아무도 몰락하지 않은 것 같은 느낌.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아무것도 끝나지 않은 이야기.


아마 이 드라마가 불편하게 남은 이유는, 몰락이 아니라 ‘리브랜딩’만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은 사라지고 브랜드만 남는다

주인공 사라 킴은 가짜 명품 브랜드 ‘부두아’를 만든다.
그리고 결국 감옥에 간다.

겉으로 보면 전형적인 추락 서사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사라 킴은 사라지지만, ‘부두아’는 더 비싸지고 더 희귀해지고 더 많은 사람이 욕망하는 이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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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몰락했는데, 기호는 오히려 성공한다.

그 순간 드라마의 중심이 바뀐다.


이 이야기는 한 여자의 추락이 아니라, 인간 없이도 작동하는 욕망의 구조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사라 킴이 실패한 이유는 가짜를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가 만든 기호보다, 그녀 자신이 더 작아졌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서는 사람이 아니라 이름과 이미지가 살아남는다.


피해자는 없다

이 드라마의 가장 인상적인 대사는 마지막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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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가 없는데 어떻게 이게 사기예요?”


그녀는 새로운 이름으로 살아갈 것이다.
죽은 무명녀 ‘사라 킴’이라는 전설이 되었다.
부두아는 더 잘 팔리고, 형사는 승진한다.


모든 것이 무너진 것처럼 보였는데, 실제로는 아무도 잃지 않았다.


고전적인 비극에서는 주인공이 자신의 욕망을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진다.

하지만 여기서 주인공은 무너지지 않는다.
시스템의 빈틈 속으로 슬그머니 이동할 뿐이다.


추락은 연출되지만, 비극은 발생하지 않는다.

이 드라마가 영리하면서도 어딘가 비겁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파국조차 관리되고 있다는 느낌.



얼굴은 바뀌어도 구조는 남는다

<레이디 두아>를 보면서, 나는 넷플릭스의 다른 작품들이 떠올랐다.

<셀러브리티>에서는 사람이 사라져도 알고리즘은 멈추지 않았고,
<마스크걸>에서는 얼굴이 바뀌어도 시선의 경제가 계속 작동했다.
그리고 <레이디 두아>에서는 사람이 사라져도 브랜드가 살아남는다.


이 작품들의 공통점은 하나다.

개인은 교체되지만, 구조는 영원하다.

그래서 이 이야기들에는 진짜 종말이 없다.


모든 결말은 다음 버전을 위한 상태처럼 보인다.

몰락조차도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우리는 무엇이 되었을까

<레이디 두아>는 잘 만든 드라마다.
미장센도 화려하고, 속도도 좋고, 배우도 훌륭하다.

그럼에도 끝까지 남는 감정은 찜찜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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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이야기들은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가”를 물었다.

지금의 이야기들은 “그 이름은 어떻게 소비되는가”를 보여준다.


우리는 더 이상 사람을 기억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남긴 이미지와 가격만 기억한다.


몰락이 사라진 시대.
모든 것은 끝나는 대신 업데이트된다.


아마 이 드라마가 보여준 것은 한 여성의 추락이 아니라, 비극조차 지속 가능한 콘텐츠가 된 세계일 것이다.



p.s.
이 작품을 두고 많은 매체가 이미 ‘진짜와 가짜의 경계’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진짜와 구별할 수 없다면 가짜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보드리야르식으로 해석했다.

물론 그 읽기가 틀린 것은 아니다.

다만 이 글에서는 그 이론을 덧붙이지 않으려 한다.


지금 우리의 세계는 이미 충분히 그 개념 속에서 작동하고 있고,〈레이디 두아〉 역시 그 사실을 설명하기보다 그 구조가 얼마나 자연스럽고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굴러가는지를 보여주는 데 더 가까워 보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제 중요한 질문은 이것인지도 모른다.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는 이미 그 구별이 필요 없는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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