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반느〉가 시간을 되돌리는 방식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종필 감독을 처음 인식한 건 김진아 감독의 단편 〈백년해로 외전〉 속 배우로서였다. 투박하고도 어딘가 서늘한 얼굴. 그 인상은 이후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서, 서울여상을 나와 자기 몫의 삶을 버텨온 ‘내 사촌언니’의 존엄을 복원하던 다정한 시선으로 이어졌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파반느〉는 그 연장선에 있다. 90년대 이후 왕가위의 스타일을 표면적으로 모방하다 사라진 수많은 영화들이 있었다. 그러나 〈파반느〉는 스타일을 재현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이 영화가 가져온 것은 형식이 아니라 정서다.
데이비드 보위 티셔츠를 입은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보는 순간처럼, 이 영화는 중심에서 밀려난 존재들이 서로의 주파수를 감지하는 과정을 조용히 따라간다.
주인공들이 일하는 곳은 ‘유토피아’ 백화점이다. 하지만 그들이 머무는 공간은 화려한 매장이 아니라 지하 주차장과 창고, 빛이 닿지 않는 후미진 구석이다.
유토피아는 ‘좋은 곳’이면서 동시에 ‘어디에도 없는 곳’이다.
이 영화가 선택한 것은 후자다.
사회가 정한 아름다움의 기준에서 탈락한 사람들에게 세계는 거대한 전시장일 뿐이다. 그들은 소비의 중심이 아니라, 그 구조의 바깥에 남겨진 존재들이다.
그래서 이들의 사랑은 현실 속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대신 이야기 속에서만, 겨우 형태를 얻는다.
영화 속에서 반복되는 말이 있다.
“사랑은 오해다.”
이 문장은 이 영화의 윤리를 정확히 말해준다.
우리는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선을 거두지 않는 것. 오해가 풀리지 않더라도,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 것.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 그랬듯, 사랑은 삶을 구원하지 않는다. 대신 사람을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든다.〈파반느〉가 멜로를 넘어서는 지점도 바로 여기다.
청음실 장면은 〈비포 선라이즈〉를 떠올리게 하는 오마주이지만, 동시에 시간의 비가(悲歌)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같은 음악을 함께 듣는 설렘의 공간이지만, 두 번째 방문에서는 상실의 장소가 된다.
같은 공간, 같은 음악.
달라진 것은 단 하나.
그때의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전봇대 아래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남자의 모습은, 지나간 시간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의 표정이다.
요한(변요한)은 〈아비정전〉의 장국영을 떠올리게 한다. 인정받지 못한 자식, 방황하는 삶, 그리고 죽음에 대한 갈망.
하지만 그는 죽음 대신 이야기를 선택한다.
현실에서는 완성되지 못한 사랑을, 소설 속에서 완성시키는 것.
이 선택은 중요하다.
최근의 많은 콘텐츠가 인물을 브랜드처럼 확장하고 생존시키는 데 집중한다면, 〈파반느〉는 사라지고 잊히는 것들을 붙잡아두는 쪽을 택한다.
이 영화가 다루는 것은 성공의 시간이 아니라, 인간의 시간이다.
파반느는 죽은 이를 위한 느린 춤이다.
이 영화는 사랑의 성공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신 실패한 자리에서 남겨진 감정이 어떻게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지를 보여준다.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없고, 현실은 여전히 잔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끝난 뒤 남는 것은 확장 가능한 이야기나 업데이트된 설정이 아니라, 오래 머무는 감정의 잔향이다.
나는 점점 커지는 세계보다, 끝내 사라질 것들을 기억하려는 이 영화의 다정함에 마음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