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가 삼킨 몸

<서브스턴스>와 이미지 산업의 잔혹극

by 라캉트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즘 리브랜딩 드라마를 몇 편 보다가 문득 한 영화가 떠올랐다. 이미지로 다시 태어나는 사람들. 낡은 기호를 지우고 새로운 기호를 덧붙이는 이야기들.


지난 글에서 나는 그것을 플랫폼 시대의 리브랜딩 서사라고 썼다. 몰락 대신 업데이트가 반복되는 세계.


그 드라마들을 보다가 자꾸 한 영화가 떠올랐다.

<서브스턴스>.


이 영화는 리브랜딩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이미지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몸을 바꾼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깨닫게 된다. 이 시대의 가장 잔혹한 리브랜딩은 사람이 아니라 몸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1. 매끈한 표면과 그 뒤의 시간

어떤 몸은 빛난다. 조명 아래에서 젊은 피부는 거의 반사체처럼 매끈하다. 카메라는 그 탄력을 천천히 훑는다. 인간의 신체라기보다 잘 연출된 광고 이미지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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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영화 <서브스턴스>는 그 조명이 꺼진 뒤의 시간을 숨기지 않는다. 빛나는 표면 뒤에는 다른 시간이 있다. 카메라가 클로즈업하는 것은 젊은 피부만이 아니라, 그 표면을 유지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육체의 비명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몸은 기묘하다. 너무 매끈하고, 동시에 너무 끔찍하다.


우리는 묻게 된다.

왜 이 영화는 몸을 이렇게까지 과장된 방식으로 보여줄까.


그것은 단순히 자극적인 바디 호러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 과잉된 스타일은 우리가 몸을 대하는 현대의 방식, 즉 이미지 산업의 시선을 거의 그대로 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2. 플랫폼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

이 영화는 흔히 말하는 '젊음과 늙음'의 이야기가 아니다. 조금 다르게 말하면, 이 영화는 두 개의 시간에 대한 이야기다.


하나는 플랫폼의 시간이다.

젊은 몸은 플랫폼의 시간에 속한다.


그 몸은 항상 업데이트된다.

항상 선명해야 하고, 항상 현재형이어야 한다.
대중에게 끊임없이 소비되는 이미지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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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늙어가는 몸은 인간의 시간이다.

이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수정도, 재촬영도 불가능하다.
시간은 그저 몸 위에 쌓인다.


그래서 이 영화의 갈등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모인다.

한 몸 안에 두 개의 시간이 존재할 때, 무엇이 살아남는가.


플랫폼은 늙음을 허용하지 않는다. 대신 새로운 버전을 요구한다. 지난 글 <레이디 두아>에서 말했듯, 오늘날의 시스템은 몰락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낡은 기호를 지우고 더 선명한 기호를 다시 붙인다. <서브스턴스>에서 주인공이 선택하는 액체는 결국 그 리브랜딩을 위한 잔혹한 연료다.


3. 욕망의 이미지

영화 속 성적 이미지는 노골적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뜨겁지 않다.


카메라는 몸을 사랑하지 않는다.

대신 몸을 측정한다.

마치 상품의 가치를 계산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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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몸은 욕망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그 욕망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 아니다.


그 욕망은 이미 설계되어 있다.

이미지 산업이 만든 욕망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섹슈얼리티는 에로틱하기보다 차갑다.


몸은 더 이상 인간의 신체가 아니다.

하나의 브랜드다.

브랜딩 된 몸은 스스로를 소비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아는 기묘하게 분열된다.

나를 유지하기 위해 나를 먹어야 한다.

이것은 욕망의 성취가 아니라 욕망의 구조가 스스로를 파괴하는 순간이다.


4. 크로넨버그 이후의 몸

이 영화의 스타일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감독이 있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다.

<비디오드롬>에서 몸은 미디어와 결합했고,
<플라이>에서는 다른 생명체로 변형됐으며,
<크래쉬>에서는 기술과 욕망의 접점이 되었다.
image.png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비디오드롬>

크로넨버그 영화가 반복해서 던지는 질문은 하나다.

몸은 어디까지 인간인가.


<서브스턴스> 역시 같은 질문을 던진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크로넨버그가 주로 남성의 몸을 통해 공포를 탐구했다면 이 영화는 여성의 신체를 통해 그 질문을 밀어붙인다는 점이다.


여기에 브라이언 드 팔마 영화에서 보던 거울과 분열된 시선, 그리고 80–90년대 에로틱 스릴러의 매끈한 과잉이 더해지면서 영화는 기묘한 혼종이 된다.


아트하우스 바디 호러이면서 동시에 쇼비즈니스 영화. 그래서 이 영화의 공포는 단순한 신체 변형이 아니다. 이미지 산업이 여성의 몸을 어떻게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는지를 보여주는 공포다.


5. 우리가 이미 살고 있는 공포

이 영화가 두려운 이유는 늙음 때문이 아니다.

진짜 공포는 우리가 이미 늙음을 오류처럼 취급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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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늙어가는 몸을 지운다. 그리고 그 자리에 더 매끈한 이미지를 덧붙인다.

그래서 <서브스턴스>의 공포는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시작된 이야기다.


이 영화에서 몸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그것은 시스템이 요구하는 규격에 맞춰 계속 수정되고 전시되는 기호들의 집합이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이미 그 기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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