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면서 생각하는 사람의 기록
봄이 오면 공원이 달라진다. 날이 조금만 풀려도 사람들은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겨우내 잠잠하던 트랙에 형광색 러닝화들이 하나둘 나타나고, 귀에는 이어폰, 손목에는 가민. 대회 시즌이 돌아왔다는 신호다. 러너들 사이에는 재미있는 인사가 하나 있다.
“주로에서 만나요.”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조금 낯설었다. 왜 하필 주로 일까. 카페에서 만나자, 밥이나 먹자고 하면 될 것을 굳이 달리는 곳에서 보자고 한다.
그런데 러너가 되고 나니 알겠다. 그건 약속이라기보다 인사에 가깝다. 우리는 결국 또 달리게 될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나는 원래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2025년 1월, 러닝을 시작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더 이상 아무것도 하기 싫지 않게 되었을 때, 처음으로 밖에 나가 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였다.
첫날, 그냥 나갔다. 큰 계획도 없었다. 공원에 뛰는 사람이 많길래 나도 걷지만 말고 천천히 30분만 뛰어보자 싶었다. 그런데 30분쯤 됐을 때 공원 세 바퀴가 코앞이었다. 그럼 세 바퀴 채우자. 그렇게 조금 더 달렸더니 4.7km였다.
그 순간 처음으로 알았다. 아, 나는 5km를 뛸 수 있는 사람이구나.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 작은 발견 하나가 생각보다 컸다. 주 3일이 주 5일이 되었고 5km가 종종 10km가 됐다. 한동안은 일주일에 일곱 번 뛴 적도 있었다.
운동을 싫어하던 사람이 쉬는 날이 아쉬워지기까지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발이 땅에 닿는 리듬이 생기고 몸이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면 머릿속도 그렇게 된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나는 어느새 달리면서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상하게도 브런치에 올리는 글 아이디어는 대부분 달리면서 떠오른다. 책상 앞에서 억지로 짜낸 문장보다 5km쯤 뛰다가 불현듯 떠오른 한 줄이 훨씬 살아 있다.
니체는 좋은 생각은 걷거나 움직일 때 온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달리기 전까지는 반쯤만 믿었다. 지금은 완전히 믿는다. 몸이 움직이면 생각이 따라온다. 아니, 정확히는 몸이 움직일 때 생각이 제 속도를 찾는다. 달리는 동안은 억지로 무언가를 떠올리려 하지 않는다. 그냥 달린다.
그러면 어느 순간 문장 하나가 슬며시 떠오른다. 그 문장이 괜찮으면 집에 와서 받아쓴다. 그러고 보면 나는 이렇게 오래 달리면서도 왜 러닝에 대한 글은 한 번도 쓰지 않았을까. 아마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달리면서 다른 것들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올해 2월, 두 번째 하프 마라톤 대회에서 2시간 4분으로 들어왔다. 지난 3월 8일 부천 국제 10km 로드레이스 기록은 54분이었다. 시작한 지 1년 남짓 된 러너의 기록이라고 하면 주변에서는 대개 놀란다. 나도 솔직히 조금 놀랐다. 그렇다고 내가 특별한 운동신경을 가진 사람은 아니다. 그냥 계속 나갔을 뿐이다. 비 오는 날도 미세먼지가 나쁜 날도 별로 뛰고 싶지 않은 날도. 러닝은 그런 운동인 것 같다. 재능보다 습관이 먼저 앞서는 운동.
요즘은 대회 시즌이 시작됐다. 공원에는 러너들이 부쩍 늘었고 커뮤니티에는 대회 후기와 기록이 올라온다. 나도 다음 레이스를 찾아보고 있다. 이 계절의 공기는 달리기에 딱 좋다. 춥지도 덥지도 않고, 땀이 날 때 바람이 조금씩 불어준다.
러너들이 “주로에서 만나자”라고 말할 때 그건 특정 대회를 약속하는 말이 아니다. 그냥 인사다. 우리는 어차피 달리는 사람들이고 달리는 사람들은 어디선가 또 마주치게 된다. 같은 코스를 반복해서 뛰다 보면 얼굴을 익히게 되고 대회장에서 등번호를 달고 만나게 되고 결승선 너머에서 서로의 기록을 확인하게 된다.
나는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랬던 사람이 이제 봄이 오면 달리고 싶어진다. 공원 트랙이 사람들로 채워지기 시작하면 나도 운동화 끈을 조이게 된다.
달리다가 글을 구상하고 집에 와서 받아쓴다. 그리고 가끔 공원에서 자주 보는 얼굴을 만나면 속으로 수줍게 말한다. 주로에서 만나요. 이제 그 말이 어떤 뜻인지 안다.
p.s- 하루키는 여전히 매일 달린다. 달리기를 그만두면 소설도 쓰지 못할 것 같다고 말한다. 나는 그 말이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다. 그리고 조금 안심이 된다. 아직 멈추지 않아도 되는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