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버닝>
이제 진실을 얘기해 봐.
영화 <버닝>의 헤드 카피는 주인공 종수의 얼굴에 집요하게 달라붙는다. 이창동은 ‘진실’이란 우리가 손쉽게 확인할 수 있는 ‘진짜’가 아님을 해미의 입을 통해 들려준다.
해미는 중학생 시절 종수가 자신에게 “못생겼다”라고 했다고 주장하며, 지금은 어떤지 묻는다. 종수는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해미는 없는 기억을 지금의 ‘진실’로 다시 말해달라고 요구한다. 종수는 어떤 대답을 해도 ‘진실’에 닿을 수 없기에 침묵한다.
이후 해미가 사라지자 종수는 벤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벤의 화장실 전리품, 두 달마다 태운다는 비닐하우스, 고양이 ‘보일’, 밀린 카드값, 깨끗하게 치워진 해미의 방…. 모든 조각은 벤을 가리키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는 종수가 의미를 덧씌운, ‘진실처럼 보이는 진짜’ 일뿐이다.
종수는 반복해서 잠에 들고, 불쾌하게 깨어난다. 단 한 번 등장하는 꿈은 강렬하다. 어린 종수가 불타는 비닐하우스를 마치 놀이처럼 바라보는 장면이다. 이 이미지는 낮의 사건—해미의 “우물” 이야기, 아버지의 폭력적 기억, 벤의 취미—가 섞여 무의식 속에서 탄생한 혼합물이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이 꿈은 오히려 ‘진실’이다. 이성으로 수용할 수 없는 잉여가 종수의 심연에서 이미지로 응결된 것이다.
종수에게 ‘진실’은 총체가 아니라 조각난 부분들의 배열로만 드러난다. 그는 미스터리한 세계를 자신이 감당 가능한 사건으로 번안하려 애쓴다. 그렇게 얻어진 투명성은 사실상 유사 투명성일 뿐이다. 배척된 이질적 요소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원금에 이자를 붙여 되돌아온다.
그래서 <버닝>의 엔딩은 악몽이다. 종수는 아버지의 칼로 시작해 벤의 라이터로 끝나는 폭력적 파국 속에 서 있다. 아무리 아버지의 삶에서 벗어나려 해도 결국 그 자리로 돌아오고, 벤이라는 ‘반포 개츠비’ 앞에서 계급적 신기루와 마주한다. 종수는 벌거벗은 채 모든 것을 던지지만, 남는 것은 실패한 오이디푸스의 치욕이다.
결국 종수는 아버지의 낡은 트럭 안에 몸을 숨기고, 창밖으로는 불타는 벤의 페라리가 보인다. 그는 아버지라는 근원적 환멸과, 벤이라는 도달 불가능한 신기루 사이를 끝없이 왕복한다.
만약 이 엔딩이 종수의 소설이라면, 그는 자신의 한계를 예술로 승화한 이야기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사실은, 종수가 ‘진짜’를 갈망할수록 ‘진실’은 더욱 멀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과연, 투명해 보이는 세계를 믿고 싶은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