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죄의식은 완벽히 봉인되었을까

<파주>(2009)

by 라캉트

<파주>는 마치 바닥에 떨어진 거울 조각을 다시 맞추는 퍼즐 같다.
하지만 그 조각들은 완벽히 들어맞지 않는다.
우리가 보게 되는 건 온전한 거울이 아니라, 왜곡된 파편의 반사다.



박찬옥 감독은 ‘형부와 처제’라는 금기의 관계를 외설이 아닌 슬픔으로 그려낸다. 8년에 걸친 이 불가능한 연애담은 낭만보다 비밀에 가깝다. 감독은 모든 조각을 일부러 섞어 놓는다. 왜 이토록 불친절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올까.


영화는 은모가 고향인 파주로 돌아오는 것으로 시작해, 다시 파주를 떠나는 것으로 끝난다. 닫힌 원처럼 완벽히 매듭지어지는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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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서 파주는 하나의 공간이라기보다, 은모의 내면에 있는 ‘봉인된 기억의 방’이다. 그녀는 이 문 안에서 ‘불현듯’이라는 장치를 스스로 발명한다. 필요할 때마다 논리의 질서를 무시하고 과거의 장면들을 끌어올린다. 언니의 죽음, 중식의 얼굴, 그날 밤의 불빛. 그녀는 퍼즐의 조각들을 모두 맞추려 하지만, 결국 손에 남는 건 어긋난 파편뿐이다.


이상하게도, 플래시백의 문을 열 때마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사람은 중식(이선균)이다. 수배 중인 신학생, 선배의 아내를 사랑한 남자, 붉은 폴로티 한 장조차 남의 것을 빌려 입는 사내.


이처럼 그에게 세상은 늘 ‘타인의 소유’다.
집도, 사랑도, 아이도 — 아무것도 그에게 속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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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세상의 모든 부채를 짊어진 사람처럼 살고, 죄의식을 자신의 영양분으로 삼는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과거의 가장 앞자리에 불려 온다. 지금을 살아도, 이미 지나간 죄의 시간 속에 머무는 남자.


그러나 여기엔 지독한 역설이 숨어 있다. 그는 세상의 대의, 학생운동과 철거민 투쟁을 위해 싸웠지만 돌아온 것은 ‘치정’과 ‘보험사기’라는 낙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말한다.


성경에도 아흔아홉 마리 양보다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이 더 중요하다고 했으니까.

그는 은모의 죄의식마저 떠맡으려 한다. 마치 스스로 희생양이 되기를 자처하는 사람처럼. 철거촌의 아수라장에서 은모가 텅 빈 눈으로 세상을 스쳐갈 때, 그녀는 이미 알고 있다. 신의 죄를 대신 짊어진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은모에게 파주는 ‘타인의 죄를 봉인한 장소’다.


그녀는 그 봉인을 열지 않는다. 오히려 죄를 중식에게 슬며시 전가시킨 채,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떠난다. 친구의 오토바이를 타고 안갯속을 빠져나갈 때, 그녀의 얼굴엔 해방과 공포가 동시에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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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죄를 버렸지만, 죄의식은 그녀를 버리지 않는다. 파주에 남은 중식은 그녀의 그림자처럼 그 모든 부채를 떠안고, 그녀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죄를 봉인한 채 살아간다. 그러나 영화는 마지막에 묻는다.


그 봉인은 정말 완벽했을까?


안갯속에서 보스(이경영)가 은모에게 건네는 은밀한 미소. 그것은 시스템의 얼굴이자, 은모의 내면에 남은 상처의 윤곽이다.

그녀가 개인적인 선택으로 중식을 배신한 순간, 그 결정은 철거위원회의 해체, 즉 시스템의 복원을 가져온다. 사적인 죄의식이 어떻게 사회적 죄의 재생산으로 이어지는지를 박찬옥은 놀라우리만치 조용히 보여준다.


<파주>의 안개는 단지 날씨가 아니다. 그건 죄의식이 만든 기압층이다. 보스의 미소, 중식의 침묵, 은모의 무표정은 그 안에서 각자의 부채를 떠안고 떠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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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화가 끝난 뒤에도 한참 동안 안갯속에 머물렀다.
죄의식은 완벽히 봉인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다른 얼굴로, 다른 관계로, 다시 돌아온다.


훗날 은모가 파주로 돌아올 때, 그녀는 과연 그 봉인을 다시 열 용기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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