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준호의 영화를 중심으로
봉준호는 언제나 우리보다 한 발 앞서 ‘악의 평범함’을 응시해 왔다.
그의 영화 속 괴물은 한강에서 기어 나오고, 어머니는 자식의 살인을 덮고,
형사는 시체를 바라보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그의 세계는 언제나 “나는 시체들이 내 눈앞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문장으로 요약된다.
봉준호의 영화는 히치콕의 후예이자, 장르의 변주 자다.
<살인의 추억>은 스릴러이면서 블랙코미디고, <괴물>은 괴수영화이면서 가족드라마다.
그의 영화는 공식과 파괴, 장르와 반전의 절묘한 균형 위에서 작동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다.
우린 그의 영화를 너무 많이 안다.
‘봉테일’이라는 별명은 우연이 아니다.
관객은 그의 영화에서 상징과 은유를 찾아 헤맨다 — 괴물은 미국이다, 마더의 침은 성기다,
<살인의 추억>은 386세대의 자화상이다.
하지만 그렇게 과잉 해석을 쌓다 보면, 정작 그 아래 깔린 ‘부재’를 보지 못한다.
봉준호의 영화는 해석을 위한 퍼즐이 아니라, '보이지 않음의 역설'로 작동한다.
봉준호 영화의 주인공들은 언제나 무능하다.
그들은 사건을 쫓지만, 끝내 범인을 잡지 못한다.
<플란다스의 개>의 윤주는 범인을 눈앞에 두고도 망설이고,
<살인의 추억>의 형사들은 유력한 용의자를 계속 바꿔치기하며 허공을 맴돈다.
<마더>의 제문은 시체를 보고도 아무 단서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 무능함은 단순한 서사 장치가 아니다.
그건 봉준호가 세계를 보는 방식이다 —
“우리는 진실 앞에서도 끝내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이 허탈함, 이 공백이야말로 그의 영화가 남기는 근본적 죄의식이다.
봉준호의 영화엔 항상 ‘시체’가 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시체를 보지 않는다.
박두만(<살인의 추억>)은 부패한 여자의 시체를 본다. 그러나 곧 시선을 논으로 돌린다.
카메라는 그의 시선을 따라가, 메뚜기를 잡는 아이들을 보여준다.
현실의 오점은 언제나 일상의 풍경에 흡수된다.
<마더>에서도 마찬가지다.
옥상 위의 시체는 서둘러 치워 지고, 약재상에서는 “시체 썩는 냄새가 난다”는 대사가 툭 튀어나온다.
그러나 인물들은 그 냄새의 출처를 모른다.
시체는 현실의 균열을 드러내지만,
서사는 그 균열을 부드럽게 봉합해 버린다.
우리는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살아간다.
봉준호의 영화에서 죽음은 우연이 아니다.
그건 계급의 얼굴을 하고 있다.
<살인의 추억>의 피해자, <괴물>의 소녀 현서,
<마더>의 ‘쌀떡 소녀’ 문아정, <기생충>의 '반지하 아래' 근세 —
그들은 모두 가난하다.
가난은 이 세계의 보이지 않는 구조적 폭력이다.
<기생충>은 이 계급의 비극을 완벽히 시각화한다.
지하와 지상의 구조는 단순한 공간 구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음’이라는 봉준호의 오래된 주제의 연장선이다.
냄새, 계단, 물의 흐름 같은 일상의 사물들이
이제는 시체보다 더 강렬한 사회적 증거물로 작동한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죽지 않아도 이미 죽어 있다.
<마더>의 모성은 이 계급의 사슬을 더 끈질기게 조인다.
아들의 죄를 덮기 위해 그녀는 또 다른 약자를 희생양으로 삼는다.
그녀의 눈물은 연민이 아니라 생존의 눈물이다.
‘울지 마라’는 종팔의 대사는
이 세계의 냉혹한 윤리 선언처럼 들린다.
봉준호의 영화에서 ‘윤리’는 죄의식의 다른 이름이다.
그의 인물들은 모두 알고 있다 —
시체들이 눈앞에 있고, 괴물이 곁에 있고,
자신이 그 구조의 공범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묻는다.
이 지옥 같은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설국열차>에서 꼬리칸의 혁명은
결국 또 다른 체제의 반복으로 귀결된다.
이 ‘윤리적 무한루프’ 속에서
봉준호는 구원이 아닌 갱신의 욕망을 말한다 —
한 번이라도, 끝까지 걸어 나가는 자들에 대한 존경.
<기생충>의 아들은 지하의 편지로 희망을 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도달하지 못할 ‘편지의 환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쓴다.
그것이 봉준호가 믿는 최소한의 윤리,
‘파국과 함께 살아가기’의 방식이다.
“나는 시체들이 내 눈앞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