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무심하게 왔다 가버린

by 생각하는냥

달력으로는 겨울 문턱을 넘어선지 며칠이 지났고

날씨로도 겨울 향기가 자욱한데

첫눈 언제오나 싶더니

이제서야 서울 하늘 가득 눈발이 날렸다.

아쉽게도 아주 잠시였지만.


잠깐 잠깐 고개를 돌려 창가를 바라보며 설레는 마음에 이리 기웃 저리 기웃 거렸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첫눈 오는 날은 설레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이와 무슨 약속이라도 해야하는 듯 했던 그런 때가 있었다. 아내에게 첫눈이 온다고 톡이나 문자를 날려놓으면 돌아오는 답문은 간단했다.


"응"


'와아~' 라는 지극히 형식적인 감탄사를 날려줬더라도 이렇게 기분이 꿀꿀해지지는 않았을 거 같다. '응'이란 답문은 오래된 부부끼리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지만 글도 기운 떨어진다. 기운 떨어지니 당도 떨어진다.


당 빨러 편의점으로 향하려는데 마침 타이밍도 어찌나 정확할까? 갑자기 회의를 하자 한다. 당 빨고 싶은데 갑자기 회의라니 센스하고는.


센스쩌는 하늘나라 선녀님들은 월요일이라고 첫눈 날려주셨는데 사람들이 기분 다 깨고 계신다. 엄연히 인재다. 첫눈 오는 날을 쉬는 날로 지정하는 센스쩌는 회사라면 뼈를 묻을까 한다. 대신에 첫눈이 왔으니 칼퇴라도. 저녁 시간 다 되어 일을 던져주는 이가 있다면 아마도 난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었던 놈이었을지도 모를거 같다.


그런데 말이다. 회의 끝나고 밖을 바라보니 그래도 첫눈 오신 날인데 조금은 어둡다거나 어딘가 희끗한 뭔가라도 흔적 남겨주신다면 얼마나 고마울까. 그렇게 어두웠던 하늘은 벌써 푸르스름하게 변해 있다. 첫눈을 못본 사람에게 첫눈 왔었다하면 거짓말 하지 말라고 할 정도로 파랗다. 이쯤되면 다중인격자 수준이다.


무심한 답문 '응' 이랑 똑같다.

첫눈 온 기분이 이리도 망가지나.


그래도 칼퇴할래.

직장인의 운명적인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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