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옷깃만 스쳐도

by 생각하는냥

옷깃만 스쳐도 전생에 인연이 있다는 불교 얘기가 있다. 작은 인연도 소중히 하라는 말이기는 하나 가끔 이 말에 충실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랑은 절대 옷깃을 스치지 않으려는 습관이 어려서부터 생겼다.

내가 옷깃을 스친다면 당신은 마음에 드는 사람이고 옷깃을 스치는 것조차 피한다면 그건 내가 당신을 무척 싫어한다는 얘기다.

귀를 덮는 SONY 헤드폰을 귀마개마냥 착용한 한 사내가 옆에 섰다. 듬성듬성 공간이 많이 비어있는 지하철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를 바라본 채로 섰다. 속으로 한마디 던진다. '미친놈'. 고개를 약간 숙인 채로 서 있는 그가 싫었다. 더군다나 생긴 것도 덕후스타일이다. 남자가 꼬이는 날은 일진이 별로기 때문에 아침부터 겪기 싫었다.

한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는 움직임이 없었다.
또 한발짝 뒤로 물러났다. 여전히 그는 움직임이 없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졸고 있었다. 하필이면 왜 나를 바라보고 졸고 있는 걸까?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세상과 차단이 된 듯한 딴 세상 사람인양 착각이 들때가 있다. 요놈이 바로 그런 상태였나 보다.

한발을 더 뒤로 물러설까 고민하고 있던 찰나 지하철이 잠깐 덜컹 거리며 그의 무릎이 순간 풀렸다. 그리고 그의 몸이 앞으로 쓰러지듯 나를 덮쳤다. 아, 젠장. 옷깃을 스치기 싫다고 그렇게까지 애원했는데 이럴수가.

현재의 인연이 과거의 없는 인연도 만들어줄까?

나는 애원한다.
부디 이 녀석과 과거에 인연이 절대 없었기를 바라며.

나는 애원한다.
오늘 부디 별일 없기를.
별일 없기를 애원했으나 별일은 어김없이 생긴다. 별볼일이 없는 서울시내에 있다고 별일을 만들어줄 필요까지는 없는데 조물주님께서는 어찌나 어김없이 별일을 만들어주시는 건지 참 대단하다.

나는 애원한다.
조물주님에게도 별일이 다 생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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