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나 드라마나 소설 속의 주인공이 아니라서 미안하다
년도는 정확하지 않지만 아마도 2006, 7년 도의 일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친구들과의 술자리를 마치고 늦은 귀가 탓에 택시를 잡았다. 뒷좌석에 앉았는데 뭔가 손에 잡혔다. 폰을 누군가 놓고 내린 모양이었다. 자세히 보니 폰은 당시에 제일 잘 나간다는 모토로라 레이저였다. 당시 제일 잘 나가는 폰이었다.
기사 아저씨에게 줄까 싶다가 아저씨 영업에 방해될까 싶어 일단 가지고 내렸다. 자칫 절도의 혐의를 뒤집어쓸 수도 있었지만 기사분이 주인을 찾아줄 확률이 반반이라면 최소한 내가 찾아줄 확률은 그보다는 높았으니까.
일단 폰을 열어 주소록의 1번을 찾았다. 당시의 주소록은 대체로 0번은 애인, 1번은 어머니가 대세였다. 과연 이 폰의 주인도?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중년을 넘긴 아주머니였다. 폰의 주인은 20대 처자였고 아주머니는 그녀의 어머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당시 총각이었더라면 아마도 이랬을 것 같다. '어떻게 이것도 연인데 장모님'이라며 인생에 몇 번 안 할 철판을 얼굴에 깔고 애교질을 하지 않았을까. 다행이지 않은가. 유부남이라서 그런 철판을 깔지 않아도 돼서.
다음 날 아침 폰 주인인 이름 모를 아가씨로부터 전화가 왔고 무척이나 고맙다 했다. 어딘가로 팔아서 이득을 취한다거나 혹은 해코지 없이 주인을 찾아주니 너무도 고마웠던 모양이다. 뭘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으니 '뭐 그냥 됐어요'라고 끝맺으려 했으나 며칠 전 어디선가 주워들은 글귀 하나가 생각나 무의식 중에 이런 말을 던졌다.
"정 고마우시면 오늘의 친절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주세요."
와, 뚫린 입이라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가 이렇게 잘도 튀어나올 수가 있나. 스스로도 가식의 절음에 놀라웠다. 닭살. 복사해서 붙여 넣기 했을 뿐인데 아가씨는 꽤 감동을 먹은 듯했다. 어쩌면 말이다, 정말 어쩌면 말이다, 총각이었더라면 이 아가씨 넘어왔을지도. 푸하하 하하하
하여간에 퀵 아저씨가 폰을 찾으러 오셨고 이내 가져가 버리며 그렇게 상황은 종료되었다.
그 이후의 스토리는 알 수 없지만 착한과에 속한 처자라면 어딘가에 친절을 베풀며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친절은 지구의 어딘가를 돌고 돌아 유독 나만 피해서 또 돌고 돌아 소소한 곳에서 유랑 중일 게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유독 나만 피해서 말이다.
기억을 떠올려보면 착한 일을 했을 때 보상을 받았던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초등학생 때 포장마차에서 거스름돈을 더 많이 받았다며 돌려주니 아주머니가 이쁘다며 핫도그 하나를 더 주셨던 거랑 최근에 물건 하나를 샀는데 인쇄물에 잘못된 정보가 있길래 업체 담당자에 알려줬더니 고맙다고 셀카봉을 덤으로 받았던 것 빼고는 내게 보상이란 손에 닿지 않는 남의 물건이었다.
맞다. 그러고 보니 또 아픈 기억 하나가 떠오른다.
대개 영화나 드라마나 소설 같은 데서 남자가 여자의 손수건을 주워주면 눈이 맞아 데이트도 하게 되고 그러면서 알콩달콩 꽁냥꽁냥 해지는 연인관계로 발전하지 않던가. 유부남도 아니고 자그마치 총각이며 모태솔로였을 때 주워준 지갑만 몇 개인데 어떻게 그 처자들은 지구 상의 그 많은 밥 한 번을 안 사준 것일까. 생각하니 마음이가 아프다. 아, 화가 난다.
생긴 게 되게 착하게 생겨서 당연한 일을 한 거라고 생각들을 하신 거였을까 아니면 유부남 같이 생겨서 그랬던 거였을까 아니면 그것이 손수건이 아닌 지갑이라서 그랬을까 아니면 사실은 착한 일을 별로 한 적이 없어서였을까?
아니다. 그냥 내가 영화나 드라마나 소설 속의 남자 주인공이 아니라서 그랬던 게다. 미안하다. 미안한 나에게 오늘 저녁 메뉴는 오징어덮밥 추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