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이유로 밤을 거닐고 있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은 밤
11월의 저녁 9시는 유독 깜깜하다. 평상시의 12시 같은 암흑이다.
신호등 앞의 한 처자는 귀에 이어폰을 낀 채 움칫거리고 있었다. 추워서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춤을 추는 것인지 애매했다. 춤도 아닌 것이 뛰는 것 같고 뜀도 아닌 것이 춤인 것 같았다. 운동복 패션에 설마 사람들 다니는 신호등 앞에서 춤을 출까도 싶지만 요즘 세상에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궁금하니 가서 물어볼까? 심하게 궁금하다.
얼마 지나지 않은 벤치 앞에는 웬 사내가 백만 스물하나 백만 스물둘을 외치는 모 건전지 광고처럼 팔 굽혀 펴기를 하고 있었다. 마치 용수철이 통통 튀어 오르듯 대단도 하다. 몇 개째인지 물어볼까? 되게 궁금하다.
다들 각자의 이유로 밤을 거닐고 있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은 밤이다.
얼마 지나지 않으니 족히 180은 넘어 보이는 처자가 빠른 걸음으로 옆을 스쳐지나고 있었다. 퇴근 중이던 나로서는 때 아닌 경쟁심이 발동하여 뒤따라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그녀에게 뒤쳐지고 싶지 않아 허벅지에 힘껏 탄력을 주어 빨리 걸어보았으나 그녀는 다리는 꽤 보폭도 넓었고 빨랐다. 그녀의 승리였다. 어느덧 그녀와의 거리도 점점 더 벌어져만 갔다.
문득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와우.' 밤하늘 치고는 밤 구름이 왜 이리 선명하고 아름다운 건지. 밤 구름에 그만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도저히 여자를 따라잡을 수 없어서 밤 구름을 핑계 삼아 그녀와의 경주를 포기한 것은 결코 아니다. 단지 새하얀 밤 구름이 너무도 아름다운 것뿐이었다.
이 시간 집 근처 6차선 신호등을 건널 때면 한껏 폼 잡고 걸어야 한다. 멈춰 선 자가용에서 뿜어져 나오는 헤드라이트를 받아가며 차 안에 앉은 수십 명의 관객들이 건널목을 건너는 사람들을 지켜볼 것이다. 그들에게 밋밋한 모습을 보일 순 없지 않은가. 고개는 빳빳하게 들고 어깨와 허리는 쫙 펴고 팔과 다리를 힘껏 내젓는 것이다. 꼬리라도 있으면 살랑살랑 흔들거나 쫑긋 세우고 걸으면 딱인데 말이다.
그리고 최종 목적지인 집으로 골인!
야근은 좀 슬프다. 남들 다 퇴근한 시간에 혼자 일하고 있노라면 서럽다. 하지만 깜깜한 퇴근길에서 마주한 이런 사소한 재미들은 낮에는 볼 수가 없지 않은가. 왜, 집에 갔다가 나오면 볼 수 있지 않냐고 물을 수 있다. 아니, 그건 아니지. 집에 일단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일이란 귀찮은 것들 중에서 만만치 않게 귀찮은 중의 하나 아니냐.
느긋한 걸음으로 밤길을 거닐며 드문드문 눈에 띄는 소소한 것들에게서 재미를 느끼는 것만으로 야근은 이제 더 이상 서럽지 아니하다. 이보다 엄청 서러운 것은 먹으려고 책상 위에 꼬불쳐 둔 마지막 귤을 어떤 양아치가 말도 없이 가져간 것 그것이 제일 서러운 것이다. 그 양아치의 뱃속에서 탈이나 나길 부디 간곡히 기도할 뿐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