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바보야? 왜 말을 못 해?
날씨가 을씨년스럽다.
한 달쯤 전 추웠을 때만 하더라도 이제 가을이 짧아지고 앞으로 추워질 날만 오겠구나 싶었다. 그러던 날씨가 이내 추위는 온데간데 사라졌고 심지어 엊그제는 더워서 긴팔을 걷어 올리게 하더니 결국 104년 만의 11월 폭우까지 내렸다. 그리고 이제야 다시 추워졌다.
비가 온 뒤라 비에 젖은 나무는 어둡게 변했다. 가지고 있던 그 풍성한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기나긴 나뭇가지만 앙상하게 드러내긴 했지만 가늘고 길게 쭉쭉 뻗은 데다 검게 변해있으니 제법 섹시하다.
겨울이 오니 나무는 옷을 벗고 사람은 하나라도 더 껴 입는다. 여름엔 그 반대였다. 사람의 삶을 나무에 비유하곤 하지만 입고 벗는 건 오히려 서로 반대였다. 그럼에도 발가벗은 모습이 아름답기는 둘 다 매한가지다. 오늘따라 발가벗은 나무의 자태가 유난히 섹시하다.
사무실에 도착하니 늘 먼저 도착해 있었던 "오해하지 말고 들어"라는 말의 주인공이 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톡을 확인하니 아니나 다를까 메시지 하나가 와 있었다.
그제 회식 때 말을 안 한 거 같다며 외부 일정 때문에 그쪽으로 바로 출근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것도 아침 8시 40분에 말이다. 그런데 그의 외부 일정이 오후 3시라는 걸 이미 알고 있는데 이건 무슨 개가 '멍멍'하는 소리일까. 반차 안 올릴 테니 눈감아달라고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심산이었다.
어차피 퇴사를 앞둔 사람이긴 하지만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선 것이다. 선을 넘어선 사람에게는 정공법이 최고다. 그에게 '오전 반차계'를 올리라고 전달하였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라는 말을 했다고 삐져서 그런 건 아니었다. 단지 난 정석대로 한 것뿐이다. 믿거나 말거나. (안 믿겠지?)
덕분에 분기충천하여 그동안 지켜만 보고 있던 부장님같이 행동하는 사원을 불러다가 불똥을 투척하였다. 'OO 씨 알죠? OO 씨가 사원임에도 불구하고 부장님 같이 행동하고 다니는 거 말이에요.'로 시작하여 '긴장 좀 하고 삽시다.'로 참고 참았던 말을 하였다. 표현상의 불똥이지만 언젠가 한 번은 훈계가 필요했고 그 타이밍이 시기적절한 것뿐이었다. 그는 오늘도 출근도장을 찍자마자 커피를 마시러 30분 이상 자리를 비웠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뉴스를 보니 '미친 게 말도 없이 퇴근했다'라고 후배 험담하던 이가 70만 원의 벌금을 받았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그래 뭐, 난 험담 안 하고 직접 대놓고 얘기한 거니까 괜찮아 괜찮아. 그리고 나, "70만 원 있어."
예전에 비해 요즘은 상사들이 스트레스를 더 받는 사회가 되었다. 해야 할 말을 못 하고 속앓이를 하다가 제 속만 긁어먹는 경우가 허다하다.
며칠 전 술자리에서 한 직원으로부터 보기에 순하디 순해 보이는 여직원 때문에 속앓이를 하고 있다는 고민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해법으로 직접 한 마디 해주라 하였다.
어차피 상사란 존재는 가만히 있어도 꼰대이고 손가락만 움직여도 꼰대인데 굳이 착하단 소리 들어서 어디에 써먹으려고 해야 할 말을 못 하고 산단 말인가.
드라마 '파리의 연인'에서 그랬다.
"너 도대체 뭐야? 왜 이러고 있는 건데? 너 바보야? 왜 말을 못 해? 그 자식이 그러고 있는데 왜 말을 못 하고 가만히 있는 거냐고!"
연인에게만 해당되는 대사가 결코 아니다.
스트레스는 너도 벗고 나도 벗고 살아가야 하는 대상이다. 어느 한쪽을 위해 다른 한쪽이 껴입고 살아야 하는 게 결코 아니란 말이다. 스트레스를 껴안고 사는 게 착하게 사는 건 결코 아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