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님, 저 내일 내시경 합니다.

시도 때도 없이 밀고 들어오는 이 착하니즘 엔진에는 대책이 없다.

by 생각하는냥

태어나서 처음 하는 대장내시경이었다.


의사 말에 의하면 신약은 한 번만 먹으면 되고 맛도 좋지만 가격이 3만 원이고 구약은 세 번이나 먹어야 하고 맛이 이상할 수 있으나 가격은 만원이란다. 다들 구약이 맛이 이상하고 물을 3리터나 마셔야 해서 힘들다 했는데 그 경험을 해보고 싶어 모험을 해보기로 작정하였다.

일단 이 약을 먹기 위해서는 내시경 전날 아침 점심을 흰 죽으로 먹고 오후 다섯 시 이후부터는 금식을 해야 한다고 설명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실수로 습관적으로 간식거리를 먹지 않기 위해 부단히 신경을 써야만 했다.

그런 그때 전화가 울렸다. 점심을 같이 먹자는 대표님 전화였다. 보통 대표님과의 식사는 서너 달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데 하필이면 음식을 조심해야 하는 일생에 처음 해보는 대장내시경 전날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물론 거절을 해도 될 일이었다. 그런데 딱히 거절을 하기도 애매한 시점이었다. 만약 저녁을 같이 하자고 했더라면 대놓고 거절을 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 점심이니 먹자니 안될 것 같고 안 먹자니 왠지 모르게 찝찝하였다.

그냥 내시경을 하기로 해서 안 될 것 같습니다 라고 말하면 되는데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이런 거절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질 못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는 사이 착하니즘 엔진이 '부앙'하고 발동을 하고만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방심한 사이 밀고 들어오는 이 착하니즘 엔진에는 대책이 없다.


그래, 뭐 그냥 나가서 빨간 것만 먹지 않으면 되지. 가볍게 먹으면 되지. 점심 한 끼가 뭐 대수라고.


출근할 때 입고 나온 롱 패딩을 걸치고 나갔는데 그에 반해 대표님의 복장은 간편하였다. 딱 봐도 밖에 나갈 의지가 없어 보였다. 그렇다는 것은 건물 안에 있는 몇 개의 식당 중의 한 곳에 가시겠다는 거 같은데. 걔 중에 문제가 될 것 같은 식당은 예상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다다르자 뜬금없이 '마라탕' 어떠냐 신다. 갑자기 마라탕? 그 많고 많은 음식 중에 마라탕은 의외였다. 마라탕은 국물이 빨갛고 맵기 때문에 대표님이 마라탕을 선택하실 거라고는 전혀 예상을 못한 것이다. 이건 내시경을 앞둔 나에겐 상당히 부담이었다.

내시경을 한다고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마라탕 집에 꼭 마라탕만 있는 건 아니니 다른 걸 시켜보자 싶어 일단 대표님의 뒤를 졸졸 따랐다. 그냥 그때 '대표님, 저 내일 내시경 합니다'라고 한마디만 하면 될 일이었는데 그 말 한마디가 이리도 어렵다.


마라탕 식당 의자에 앉아서는 '저는 마파두부밥을 먹겠습니다'라고 아주 소심한 의견을 제시하였다. 마라탕 전문집이라 마파두부밥도 빨갛고 맵게 나오기는 하지만 대충 알아서 골라 먹으면 될 일이었다. 마라탕을 먹으려고 했던 대표님도 나를 따라 메뉴를 변경하였다. 처음이지만 마파두부밥을 먹겠다고 말이다.

그렇게 우린 잠시 마파두부밥 동맹이 결성되었다.


이윽고 식사가 나와서 먹는데 뭐랄까 대표님 드시는 모습이 시원찮아 보였다. 몇 숟가락 드시더니 반을 남기는 게 아닌가. 혹시 입맛이 맞지 않으신 거냐 물으니 매워서 못 먹겠다는 게 아닌가. 오잉? 이게 맵다고? 분명 이건 마라탕보다 덜 매운 음식인데 이게 맵다고? 그럼 마라탕은 어떻게 먹으려고 했던 걸까?


아니, 거 참 희한하네. 매운 걸 먹지도 못하면서 굳이 왜 마라탕을 먹자고 제안을 한 것일까? 그것도 내시경 하기 전날에 말이다. 휴가계를 올릴 때에도 분명 '검진'이라고 올렸는데 말이다.


어쩌면 대표님이 장난을 친 것인데 내가 눈치 없이 그 장난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사람마다 장난을 거는 방식은 다양하니까 대표님표 장난은 이런 거였을지도 모른다. 아, 내가 눈치 없이 너무 진지했구나. 그런데 이런 장난엔 어떻게 받아쳐야 하는 거야?


마파두부밥 동맹은 그렇게 허무하게 파투 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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