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처음 대장내시경 하던 날

어디 가서 정치나 종교 얘기는 하지 말라 그랬다.

by 생각하는냥

생애 처음 대장내시경 하던 날이었다.


수면 주사를 맞고 잠시 방심한 사이 모든 게 다 끝나 있었다. 와. 이게 뭐야. 이리도 신기할 수가 있나.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힘든 일 있을 때 눈 딱 감고 있다 눈 뜨면 모든 게 끝나 있기를 바라는 그런 때 말이다. 언제 잤는지도 모르게 잤다가 눈 떠보니 모든 게 상황 종료가 된 상황이었다. '프로포폴 프로포폴 하더니 바로 이 느낌이구나.' 개인적으로는 별로다.


나의 잃어버린 시간.

실제 시간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난 얼마인지도 모를 그 시간을 잃어버렸다. 내 몸속에서 검사도구는 어떻게 꿈틀댔는지 모르니 약간의 불안함, 거기에 무슨 실언을 했을지도 모르는 찝찝함이 더해진다. 설마 나의 인격을 깎아먹을 만한 단어들을 내뱉은 것은 아니었겠지? 그러나 이미 지나간 버스요, 상황은 종료되었다. 후회해봤자 알려줄 이도 없다.


어디 가서 정치나 종교 얘기는 하지 말라 그랬다.

몸을 일으켜 세우려는데 순간 비틀거렸고 간호사를 따라 회복실로 들어가니 꽤 연배가 많으신 어르신이 먼저 누워 있었다. 누워서 쉬는데 어르신이 심심했는지 뜬금없이 "요즘 문재인 정부를 어떻게 생각해요?"라며 시비를 걸 듯 물어왔다. 아, 비몽사몽간에 전투가 벌어지겠구나 싶었다. 내 전투력은 약하다. 게다가 나의 주특기인 삼십육계 줄행랑은 회복이 덜 된 상태라 지금 당장 시전을 할 수도 없어 지극히 불리한 상황이었다. 여기서 싸우면 백전백패인지라 비기기 작전에 돌입하기로 작정하고 되받아쳤다.


"어디 가서 정치나 종교 얘기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정치 종교 얘기하면 반드시 싸움 난다 해서요."


그렇게 받아치면 끝날 줄 알았으나 그는 백전노장이었다. 그가 거기서 멈출 거라고 생각했으나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었다. 그는 다른 말로 주제를 돌리더니 이내 또다시 공격이 들어왔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미국 싫어하잖아요. 무조건 싫어하던데. 우리가 미국 없었으면 대한민국이 있었겠어요? 6.25 때 우리 살려준 게 미국인데. 미국 없었어봐. 우리가 있었겠는지."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가 될 것만 같았다. 가마니가 되느니 한마디라도 하고 처절히 전사하겠노라고 다짐하며 정치 프레임에 휘말리지 않을 것 같은 선에서 반격을 가하였다.


"아니에요. 젊은 사람들이 어르신들보다 미국 더 좋아해요. 어르신들이 사용하지 않는 애플 휴대폰 더 사용하고요, 나이키 브랜드 좋아하죠. 게다가 미국 영화 개봉하면 극장으로 당장 달려가잖아요. 어르신들보다 젊은 사람들이 미국 더 좋아하는 거 맞습니다. 그런데도 젊은 사람들이 미국을 반대하는 건 마땅히 따져 물을 게 있어서 그런 거죠. 예를 들어서 1조 원 하던 방위비를 갑자기 6조 원 내라고 하니까 도둑놈 심보 아닙니까. 아무리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라고 하더라도 쓸개주고 간까지 내 줄 순 없는 거잖아요."


돈에는 장사 없으므로 은근슬쩍 돈으로 팩트를 짚어주니 어르신도 쉽게 동조하였다.


"그건 그래요. 6조 원 내라는 건 지나치긴 하죠."


논쟁은 결론부터 접근하면 싸울 수밖에 없다. 그래도 다행인 건 동기나 과정을 일일이 따져보면 그중엔 공통점이 있기 마련이다. 그 공통점을 끄집어낸다거나 혹은 돈이라는 소재를 이용해 이야기를 끌어가면 조금은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유리해지곤 한다.


마땅히 할 말이 없어진 어르신은 젊었을 때의 자신의 무용담(?)으로 주제를 바꾸었다. 그래도 들을만했는데 그 와중에 은근슬쩍 종교 이야기로 갈아타는 게 아닌가. 죽다 살아난 이야기를 하며 하나님을 두 번이나 봤다 하는데 죽다 살아난 사람의 이야기까지 어찌할 순 없어 결국 백기를 들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난 어느새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순한 양이 되어 주었다. 관심도 없는 어르신의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덧 몸은 회복이 되었으나 정신은 혼돈 속으로 떨어져 갔다.


회복이 되자 먼저 병원을 나서는 어르신은 마지막으로 '이것도 인연인데 교회에 꼭 나가라'는 마지막 펀치를 날리곤 환한 웃음을 지으며 사라져 갔다.

이 한 몸 바쳐 방황하던 영혼을 구한 것 같은 이 느낌은 대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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