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미와 길을 잃다

by 나타미

Y 아저씨랑 6시에 일어나서 반쯤에 출발했다. 아침에 알베르게에서 주는 조식을 먹고 바로 앞에서 빵이랑 먹을 간식거리를 샀다. 피레네산맥을 넘을 땐 배낭에 먹을 게 많은 게 좋다. 해도 뜨기 전이었는데 많은 순례자들이 길을 나서고 있었다.

너 걷는 거 싫어하잖아


등산을 해 본 게 언제더라. 고등학교 때 학교에서 지리산을 두 번 정도 갔었다. 천왕봉까지 올랐었는데 그때도 죽을 것 같이 올랐었다. 평소에도 걷는 거는 질색을 하며 무조건 계단 대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어딜 갈 때도 조금이라도 덜 걷기 위해 최단 동선을 외워 뒀다. 내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간다 하니 친구들은 "너 걷는 거 싫어하잖아"라고 말했다.


순례길을 오기 전에 분명 나는 운동을 하고 체력을 길러서 오려고 했다. 오기 전에 여행 경비를 마련한다고 새벽 2시까지 알바를 해 운동할 시간이 없었을 뿐. 그렇게 내 몸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산티아고에 나섰던 것이다.

평균 이하의 체력. 밖에서 조금만 돌아다녀도 금방 기운이 떨어지고, 여행 가서도 힘들어서 일정을 다 소화 못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어떻게든 되겠지.


피레네 시작

밑에서부터 8km 정도 올라가면 오리손 산장이 나온다. 예약을 몇 달 전부터 해야 하고 가격도 꽤 비싸다고 Y 아저씨가 말해주셨다. 아저씨는 예약을 해 놨기 때문에 거기서 묵는다고 하셨다. 나는 오늘 산을 넘어가야 했다. 처음 출발은 산뜻했다. 아저씨와 서로 사진도 찍어주고 풍경도 보고. 날이 흐릿흐릿했다. 순례자들은 서로를 향해 "부엔 까미노"를 외치며 설레는 발걸음을 시작했다.


아저씨가 앞에서 걷고 내가 뒤에서 걸었다. 오리손까지 꽤, 꽤 오르막이다. 등산에 익숙한 한국 중년의 발걸음을 내가 따라가기는 무리였다. 뒤처지지 않게 최대한 힘을 냈다.


가파른 오르막을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리손에 도착했다. 아저씨는 너무 빨리 도착해서 당황한 듯 보였다. 시간도 너무 많이 남아 아저씨도 그냥 론세스바에스까지 가시기로 했다. 나는 마음이 약간 급해졌다. 론세스바에스에 늦게 도착해서 알베르게에 자리가 없으면 어쩌지 하고.

안개 자욱한 피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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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레네에 안개가 짙게 깔렸다. 풍경이 아름다워 힘든 것도 잊고 오른다는 피레네인데 안개는 점점 심해지더니 20m, 10m 앞 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저씨는 풍경을 못 봐 많이 아쉬워했지만 난 원래 안개를 좋아하기 때문에 괜찮았다.


아저씨와 속도 차이 때문에 자연스레 따로 걷게 되었다. 아저씨는 먼저 가면서 앞에서 길이 헷갈리는 곳이 있으면 기다리겠다고 했다.


위로 올라갈수록 서늘해졌다. 바람막이를 꺼내 입었다. 안갯속에서 종소리가 가끔씩 들려왔다. 소 목에 달린 종소리였다. 소들은 산맥 위에 평화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당장 엘프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듯 신비로운 분위기였다.

중간에 작은 푸드트럭이 있었다. 거기서 바나나랑 커피, 빵 같은 것을 간단히 먹었다.


일본인 미나미와 길을 잃다


푸드트럭에서 간식을 먹고 다시 힘을 냈다. 거기서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곳에서 일본인 미나미를 만났다. 미나미는 나보다 몇 살 언니였고 간호사로 탄자니아에서 일을 하다가 여기에 왔다고 했다. 멋있었다. 미나미와 나는 말도 잘 통하고 걸음 속도도 비슷해서 계속 같이 걸었다. 우리는 대부분 사람들보다 걸음이 느렸다.

날이 더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이슬비 같은 게 내리고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안개 때문에 가뜩이나 시야도 좁은데 앞뒤로 사람 한 명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그래도 미나미랑 같이 걷고 있고, 또 분명 길은 하나였으니 헤맬 일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야기에 너무 몰두했던 탓일까? 갈림길 비슷한 게 나왔는데 길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도 한 명 보이지 않았고,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내 핸드폰은 프랑스에서만 쓸 수 있는 유심이라 피레네에서 데이터가 잡히지 않았다. 미나미 핸드폰도 데이터가 약하기는 매 일반이었다. 겨우겨우 GPS를 잡았는데 순례길 경로에서 약간 이탈한 것처럼 보였다. 마음이 불안해졌다. 체력은 많이 떨어져 지친 상태였고 산에서 실종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순례길에는 많은 순례자들의 무덤이 있다. 그 무덤들의 사연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미나미는 핸드폰을 보더니 이쪽으로 가면 된다는 확신을 보였다. 나는 불안했다. 하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따라가는 수밖에. 나는 길에 혹시나 남아 있을 순례자들의 발자국을 찾으려고 계속해서 땅을 쳐다봤다. 아무것도 없는 듯했다. 한 해에 걷는 순례자들의 수가 얼만데, 이렇게 아무 흔적이 없을 수가 있나? 아 이 길은 아니야. 미나미한테 몇 번이고 여기로 가는 게 맞냐고 물어봤다.

온갖 불길한 상상을 했다. 힘이 빠져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되고, 산에서 밤을 맞는. 그렇게 실종 신고가 되고 영 영 산에 갇히는 상상을 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미나미는 나를 옳은 길로 데려가고 있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저 멀리서 사람들이 보였다. 살았다!라는 기쁜 마음.


물이 나오는 곳에서 순례자들이 쉬고 있었다. 우리도 거기로 가 물을 먹고 사람들에게 우리가 이상한 길로 온 것이 틀림없다며 얘기를 했다. 혼자 피레네을 넘었으면 어쩔 뻔했지,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피레네...힘들어...살려주세요......


길을 제대로 찾았다는 안도감에 잠시 기뻤다. 거기서부턴 정말 고행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등산화, 익숙하지 않은 배낭 무게,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길.


미나미와 나는 말이 없어졌다. 계속해서 걸었다. 그냥 계속해서 걸었다. 오르막을 오를 때 앞을 많이 쳐다보면 안 된다. 그럼 더 힘들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발바닥, 종아리, 허벅지는 무거워졌다. 빗줄기도 거세져서 순례길 첫날부터 우비를 꺼내 입었다. 큰 우비는 움직임을 더 둔하게 만들었다. 이러다 여기서 죽겠네.


뭔가 순례자들 중에 우리가 거의 끝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안갯속을 계속해서 걷다 보니 저 멀리서 Y 아저씨가 나를 불렀다. 내가 이 길을 헷갈려 할 것 같아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소리치셨다. 감사했다.


내리막이라고 쉬운 게 아니었다. 발목이 더 아픈 느낌이었다.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저 멀리서 론세스바에스 알베르게가 보이기 시작했을 땐 몸이 탁 풀리는 것 같았다.


걸을 땐 분명 엄청 힘들었는데 안개 낀 피레네의 분위기는 잊지 못할 것 같다. 다시 가라면 또 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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