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세스바에스에서 주비리 1> 8월 8일(수)
스페인 커플 닐과 리오
어제 택시를 타고 론세스바에스가 아닌 다른 곳에서 잔 덕분에 오늘 걸어야 할 거리에서 6km 정도 줄었다. 여유가 생겼다. 미나미가 나를 기다리는 듯해서 그러지 말라고 하고 먼저 보냈다. 7시쯤 천천히 출발했다. 시원하고 해도 없어서 시작이 좋았다. 가다가 어디로 가야 할지 헷갈렸지만 뒤에 곧 이탈리아 아저씨들이 와서 따라갈 수 있었다.
길 위에서 오는 행복감
어제 피레네산맥을 넘고 나니 오늘 길은 비교적 쉽게 느껴졌다. 풍경들은 그림 같았다. 프랑스 소설, 옛 고전들에서 나왔을 법한 풍경들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내가 이곳에 있다는 사살이 믿기지 않았다. 그러면서 행복감이 넘쳐흘렀다. 혼자 걷는 길 위에서 기쁨이 샘솟는 듯했다. 내가 지금껏 느끼지 못했던 깊은 행복을 느꼈다. 살면서 완벽한 행복을 느꼈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상의 행복이 존재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우울함도 외로움도 즐거웠다. 이탈리아 아저씨와 얘기도 했다. 이름이 안젤로였나? 뭔가 동양인을 무시하는 듯한 시선이 싫었는데 내 착각이었던 것 같다. 와이프가 비행기 타는 것을 무서워해서 혼자 왔다고 했다. 애들도 두 명 있다고 했다. 내가 영상을 전공한다고 하니 나보고 까미노에 대한 다큐를 만들어도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이탈리아 아저씨와 헤어지고 계속 걷다 작은 개울을 마주쳤다. 잠시 앉았다가 가려는데 거기서 스페인 커플이 주도적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대화를 이끌고 있었다. 나중에 이 커플과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걸어가다 그 커플이 오길래 걸음을 조금 늦춰 이야기를 나눴다. 남자는 닐이고 여자는 리오였다. 둘은 6년간 연애를 했고 결혼 한지는 1년 정도 됐다고 했다. 그리고 리오는 임신 중이라고 했다. 놀라웠다. 출발 전 날 임신 사실을 알았다고 했다. 그래서 짐을 모두 닐이 들고 있었다.
밝고 유쾌해 보이는 두 사람이 만들 가정은 행복할 것 같았다. 오는 내 내 같이 얘기를 나눴다. 얘기를 하다 보니 다리가 아픈지도 모르고 씩씩하게 잘 걸었다. 길 위에서 만나는 인연들이 얼마나 신기하고 재밌던지.
결혼, 아이를 낳는 것, 종교
닐과 리오는 둘 다 25살이었다. 일찍 결혼하는 건 스페인에서도 흔한 일이 아니라고 했다. 둘의 결단이 부러웠다. 그리고 나중에 이탈리아 부부 둘을 만났는데 나이가 많은 부부였다. 그런데 아이는 없다고 했다. 참, 삶은 누구에도 같을 수 없는 거고 삶의 양식은 개인의 수만큼 다양한 건데 왜 우리나라에서는 하나의 길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까.
산티아고를 오기 전부터 기대했던 게 하나 있었다. 거기에 가면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겠거니 하고. 결혼도 겁이 나고, 애도 낳기 싫다고 했다가 전에 만났던 사람에게 차였었다. 아직 어린 나이인데,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나 뭐라나. 내 생각을 이해받고 싶었는데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닐은 내게 크리스챤이냐고 물었다. 내 생각에는 아닌 것 같다고 대답했다. 평생 교회를 다니고 모태신앙으로 자라왔지만 믿음은 없었다. 가족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일요일에 교회를 다니고 있지만 나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느낌이라 힘들었다. 그들에게 신이 살아있는 걸 믿냐고 물었다. 리오는 그렇다고 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했더니 그녀는 웃으며 어려운 질문이라고 했다. 닐이 대신 대답했다. 앞의 숲길을 가리키며 이 아름다운 자연을 사람이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그리고 누군가 죽었을 때 어디론가 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자신에게 위안을 준다고 했다. 신앙은 나에게 달린 거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