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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타미 Jan 01. 2021

너의 그늘


너에게 고백을 하고 고백을 들었던 어느 날이었다. 우리는 환승 버스 정류장에서 헤어졌다. 그 날은 매년 돌아오는 유례없는 한파가 찾아온 날이었고,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환승 버스 정류장에는 입김을 내뿜으며 손을 녹이는 인파로 가득했다. 너에게 편지를 줬다. 미술관에 가기 전 쓴 편지였다. 프랜차이즈 카페 창가에 앉아 펜으로 글자를 꾹 꾹 눌러썼다. 손이 오랫동안 저릿했다.


우리는 추운 겨울에 더운 가게 안에서 차가운 빙수를 먹었다. 얼음이 다 녹아 없어질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너는 말했고 나는 들었다. 너는 부끄러움도 없이 자신이 예전에 고뇌에 빠졌을 때 쓴 일기 같은 것을 보여줬다. 나는 네가 조금 가까워진 모든 사람에게 이런 글을 보여주는 걸 알았기에 들뜨지 않았다. 너의 이야기는 슬펐고 때론 덤덤했기에 나는 더 덤덤한 척 얼굴을 포장했다.


오랜 이야기의 끝은 재빠른 인사였다. 번호도 기억나지 않는 버스는 바로 정류장에 도착했고, 나는 너에 손에 편지를 쥐어주고 도망치듯 버스에 올라탔다. 편지를 읽고 너에게 무슨 연락이 올까 기다렸지만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았다. 많은 시간 동안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았고, 앞으로도 오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공기는 차갑지만 햇살만큼은 밝은 어느 날이었다. 서울은 온 곳이 빌딩 숲이었다. 빌딩 숲 사이는 햇볕이 강한 날에도 해가 잘 들어오지 않았다. 온 곳이 그늘이었다. 너는 밝은 얼굴을 하고도 빌딩 숲 사이에 사는 사람 같았다. 너의 그늘을 나만이 독점하고 싶다는 욕심도 잠깐이었다. 나는 네가 이 빌딩 숲 사이에서도 해를 만나기를 바랐다. 주황빛의 햇살이 서리 서린 너의 얼굴을 따스히 감싸주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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