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는 여정 03: 내 적성은 '비서'였다.
열아홉, 입대했던 순간을 돌이켜보면 나는 조직 생활에 비교적 빠르게 적응하는 사람이었다.
나보다 서너 살 많은 동기들 사이에서도 크게 흔들리지 않았고,
전역 무렵에는 부사관들에게 직업군인을 권유받을 정도였다.
이는 내가 조직의 미묘한 흐름과 질서를 읽는 데 능숙한 재능이 있었다는 뜻일 것이다.
학교 현장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회식 문화, 특히 술자리는 끝내 익숙해지지 못했지만,
업무만큼은 늘 안정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맡은 일은 빈틈없이 정리했고, 누락될 수 있는 부분은 먼저 살폈다.
나는 맡은 자리가 교사였지만, 일하는 방식은 늘 행정의 중심에 가까웠다.
나는 교사였지만, 나의 역할은 조금 달랐다.
아무도 시도하지 않던 개인의 상담 연수를 기획할 때도, 나는 앞에 나서서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대신 학교 예산을 활용할 수 있도록 문서를 만들고 논리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 길을 다듬었다.
관행처럼 내려오던 성적 통지표 양식을 바꾸거나 심리검사 업체를 새롭게 교체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자료를 정리하고, 누구나 합리적인 수긍을 할 수 있도록 명확한 근거를 만드는 것이 내 몫이었다.
결정은 늘 다른 사람이 했지만, 그 일이 막힘없이 굴러가도록 사전 조율하는 역할은 자연스럽게 내가 맡게 되었다.
이런 방식은 교사와 행정실 직원 사이에 존재하던 보이지 않는 거리마저 희미하게 만들었다.
행정실 직원들과의 관계는 유독 편안했고,
주변 선생님들이 "어떻게 그렇게 잘 지내세요?"라고 물을 정도였다.
생각해 보면, 행정실 입장에서 나는 손이 거의 가지 않는,
오히려 일을 덜어주는 교사였기 때문일 것이다.
상담 공부를 하며 여러 심리 검사를 경험했다.
성격검사, 적성검사, 흥미검사까지. 그 결과는 의외로, 그리고 소름 끼치도록 분명했다.
내게 가장 적합한 직업군은 다름 아닌 '비서'였다.
전체를 기획하고 조율하지만, 앞에 나서기보다는 뒤에서 사람을 살리는 역할.
이야기를 들은 동료 선생님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딱 맞는 말이네요."
그제야 나는 깊은 이해에 도달했다.
내가 교사여서 잘했던 것이 아니라,
어떤 자리에서든 책임감과 시스템을 통해 같은 방식으로 일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내 즐거움의 뿌리가 직업이 아닌 성향에 있었음을 마침내 인정하는 순간이었다.
문제는 그 깨달음 이후였다.
그렇다면 서른 중반의 나이에, 이 대한민국에서 '비서'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까?
방법도, 확신도 없었다.
무엇보다 이 안정적인 교직을 뒤로할 용기가 부족했다.
하지만, 이제 그 용기를 낼 수 있는 기회에 맞닥뜨렸다.
그래서 나는 생각을 바꾸었다.
직업을 고르기 전에, 나를 더 알아보기로 했다.
"차라리, 나를 제대로 한 번 찾아보자."
그 다짐이 이후의 방황을 시작하게 했다.
심리학자 칼 융은 말했다.
"자신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 삶은 결국 타인의 삶을 대신 살아가는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타인의 프레임 안에서 훌륭하게 빛나왔다.
이제는 뒤에서 빛나는 나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빛을 낼 수 있는 곳을 찾아 나서야 했다.
다음 글에서는 쉼을 찾으러 떠났다가 방황으로 이어졌던 템플스테이의 이야기를 꺼내려한다.
그때의 나는 아직, 나를 포기하지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