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라는 거울을 깨고 마주한 ‘우리’

나를 품은 우리 03: 내 안의 어린 아들과 먼저 화해했다

by 낙천지명

교직에 갓 들어선 스물예닐곱 무렵, 어머니는 유난히 나의 결혼을 서둘렀다. 주변에 교사가 많으니 부부 교사가 되면 얼마나 좋겠냐며 주말마다 부지런히 만남의 자리를 마련하셨다. 하지만 그 만남들은 늘 몇 번의 만남을 채 넘기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반복했다.

상대도 나도 사회 초년생이었기에, 그 시절의 결혼은 나의 자발적인 선택이라기보다 부모님의 간절한 바람을 대신 수행하는 숙제처럼 느껴졌다. 어느 토요일 오후, 소개팅 약속을 앞두고 텅 빈 교무실에 남아 시간표 작업을 하던 순간이 기억난다. 시계를 보며 ‘이 일을 한두 시간만 더 하면 끝낼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이 스친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게는 누군가를 만나려는 마음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도망치듯 떠난 여행 뒤에 숨겨진 진실

그날 이후 어머니께 당분간 소개를 멈춰달라 부탁했다. 명절이면 결혼하라는 잔소리를 피해 도망치듯 해외로 떠났다. 겉으로는 정신적인 자유를 외쳤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결혼에 대한 막연한 혐오와 두려움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 정체를 알게 된 건 한참 뒤 상담 공부를 하면서, 그리고 ‘나를 찾는 여정’의 한복판에서 나를 깊이 들여다보면서였다.

나의 기억 속 아버지는 남편으로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으로서의 존재감이 희미한 분이었다. 어머니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홀로 생계를 책임지며 일만 하셨다. 외할머니와 함께 살던 집은 식구는 많았지만 늘 적막했다. 도시락을 예쁘게 싸주는 엄마의 다정함 대신, 삶의 무게를 견디는 뒷모습을 보며 자랐다. 훗날 어머니는 "그땐 돈을 벌어 너희가 공부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하는 게 전부인 줄 알았다"며 미안해하셨지만, 그 결핍의 기억은 내 안에 단단한 옹이가 되어 박혀 있었다.


닮고 싶지 않았던 뒷모습을 딛고 서서

가장 무서웠던 것은 내가 그토록 닮기 싫어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어느새 내가 반복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공포였다. 남들에겐 돈을 잘 써 호인이지만 가족에게 소홀한 사람, 존재감이 희미한 가장. 책이나 드라마 속에서 그런 인물들을 마주할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버지가 되는 일에 자신이 없었기에, 나는 가정을 꾸리는 일로부터 도피해 왔다.

심리학자 칼 융은 "우리는 부모의 삶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다른 선택을 배운다"라고 말했다.

그 문장을 만난 뒤에야 나는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다. 불안정했던 유년의 기억은 나를 주저앉히는 족쇄가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가장 선명한 기준이 되어주었다. 어떤 남편이 되고 싶은지, 어떤 아버지가 되고 싶은지 나는 누구보다 처절하게 고민해 왔다. 아픈 기억은 이제 나를 찌르는 가시가 아니라, 다르게 살고 싶다는 열망을 깨우는 나침반이 되었다.


준비된 마음으로 건네는 첫인사

새로운 직장에 적응해 가던 그해 추석, 나는 처음으로 어머니께 결혼에 대한 진심을 전했다. "좋은 사람이 있으면 이제 만나보고 싶어요." 나의 고백에 어머니는 말없이 환하게 웃으셨다. "이미 줄 서 있으니 걱정 말라"는 농담 섞인 대답이었지만, 그 웃음 속에는 오랜 시간 아들의 방황을 지켜본 어머니의 안도와 미안함이 섞여 있었다.

이제야 분명히 안다. 그동안 결혼을 미뤄왔던 진짜 이유는 자유에 대한 갈망이 아니라, 내 안의 두려움을 직면할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나는 이제 부모라는 거울을 깨고 나와, 나만의 색깔로 채워질 ‘우리’의 집을 지을 준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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