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크는 매일 02: 부모라는 이름으로 함께 걸음을 맞춘다는 것
열 달이라는 긴 기다림 끝에 건강한 아이를 만났다.
작고 따뜻한 생명을 처음 품에 안던 그 찰나의 무게를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날, 우리는 비로소 누군가의 자녀에서 누군가의 부모가 되었다.
아이를 집으로 데려온 날, 우리 부부는 두 가지 약속을 다시금 확인했다.
그것은 아이를 어떻게 키울지에 대한 거창한 교육 철학이라기보다, 우리가 지켜내고 싶은 삶의 기준이었다.
그 첫 번째는 아이가 세 살이 될 때까지 부모가 가장 가까운 곁을 지키는 '주 양육자'가 되자는 것이었다.
현실적인 제약도 있었다.
내 곁에는 어머니가 계시지 않았고, 장모님 역시 연로하셨기에 돌봄을 부탁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하지만 설령 곁에 도움의 손길이 가득했더라도 우리는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아이의 생애 초기, 그 찬란하고도 연약한 시간을 다른 이의 손이 아닌 우리 부부의 온기로 채워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내는 남들이 필수 코스로 여겼던 산후조리원도 다녀오지 않고, 출산 사흘 후 퇴원하자마자 집으로 왔다.
물론 4주 동안 낮에는 산후도우미와 함께 아이를 돌보았다. 그 이후론 오롯이 우리 부부의 몫이었다.
아내가 낮 시간을 책임지면, 나는 퇴근 후의 육아를 온전히 이어받았다.
밤마다 두 시간 간격으로 울리는 알람 소리는 단잠을 사정없이 깨웠다.
분유를 먹이고, 조심스레 트림을 시키고, 다시 잠들 때까지 토닥이는 새벽은 짧게 끊어졌으나 이상하게도 힘들지 않았다.
다행히 직장의 육아시간 제도를 활용해 매일 두 시간씩 아이와 더 눈을 맞출 수 있었다.
그 두 시간은 육아의 무게를 나누는 숫자를 넘어, 아빠로서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귀한 틈바구니였다.
두 번째 약속은 조금 더 단호했다.
두 돌이 될 때까지 아이에게 영상을 보여주지 않기로 한 것이다.
거실에서 TV가 사라진 자리에 요즘은 생경한 라디오가 놓였다.
화면 속의 화려한 색채 대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사람들의 정겨운 이야기가 집 안의 공기를 채웠다.
가끔은 라디오에 우리 집 육아 사연을 보내기도 했다. 디제이의 목소리로 우리 이름이 불리고 소소한 선물을 받던 날들은, 단조로운 육아 일상에 찾아온 작은 축제와도 같았다.
영상 없이 지낸 덕분일까.
아이는 조금 자라 식당에 가서도 스마트폰을 찾지 않았다.
우리는 화면 대신 서로의 눈을 보며 밥을 먹고, 서툰 단어들을 섞어 대화를 나누었다.
아이가 열 달쯤 되었을 때, 나는 일 년간의 육아휴직을 결정했다.
그 시절 나에게 가장 큰 도전은 '이유식'이었다.
평소 요리라면 겁부터 내던 나였지만, 이유식은 달랐다.
간을 하지 않아도 되니 맛에 대한 부담이 적었고, 대신 신선한 재료를 마음껏 조합해 볼 수 있는 즐거움이 있었다.
냄비 앞에서 정성껏 저어 만든 미음은 아이에게 보내는 나의 가장 정직한 연애편지였다.
이유식을 매개로 아이와 보낸 시간만큼 우리 사이의 애착은 깊어졌다.
아내는 가끔 "둘이 너무 친한 거 아니야?"라며 질투 어린 농담을 던졌지만, 그 농담 속에 담긴 안도감을 나는 안다.
물론 작은 부작용도 있었다.
아내의 퇴근을 기다리며 아이를 데리고 카페를 전전한 탓에, 아이에게는 장난감 냄새보다 쌉싸름한 커피 향이 먼저 익숙해졌다.
지금도 내 커피 잔을 보면 조금만 달라고 애교를 떠는 아이의 모습은 우리 가족의 가장 유쾌한 순간이 된다.
아이는 20개월 무렵부터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했다.
나의 복직과 맞물린 현실적인 선택이었으나, 그 외의 시간은 여전히 '우리'라는 틀 안에서 함께 흘러갔다.
틈만 나면 간단한 짐만 챙겨 들고 가족 여행을 떠났다.
목적지가 어디든 상관없었다.
함께 길을 걷고, 같은 풍경을 바라보는 그 시간 자체가 우리 가족의 단단한 뿌리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우리의 두 가지 원칙이 완벽한 정답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고집 덕분에 우리는 아이와 더 깊이 연결될 수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분명한 진리를 배웠다.
육아란 아이만 자라는 과정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미국의 교육자 프레드 로저스는 말했다.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함께 보내는 시간이다.”라고.
그 시간을 선물하면서 정작 가장 많이 자란 사람은 나였다.
아이를 바라보며 나는 매일 조금씩 '진짜 부모'가 되어갔고, 내 안의 부족함을 채워 나갔다.
지금 우리 가족을 감싸는 이 다정한 공기는, 그때 우리가 기꺼이 내어준 그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 만든 가장 아름다운 보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