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크는 매일 08: 정체가 없는 삶보다 정다운 동행을 꿈꾸며
“길이 안 막히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아이의 네 번째 생일날, 어린이집에서 촛불을 끄며 무엇을 빌었냐는 물음에 아이가 내놓은 답이었다.
장난감 로봇이나 달콤한 간식을 말할 줄 알았던 나는 잠시 멈칫했다.
가볍게 웃어 넘기기엔 아이의 목소리가 너무나 정직했고, 그 소원이 향하는 곳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가슴 한쪽이 조용히 떨려왔다.
머릿속에 지난 등원길의 풍경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조금이라도 정체를 피하려 시계를 힐끗거리던 초조함, 앞차의 뒤꽁무니를 보며 내뱉던 짧은 한숨들.
아이에게 그 긴 시간은 단순한 교통 체증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가족이 온전한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건너야 할 절박한 강이었고, 아빠의 표정이 굳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아이만의 간절한 배려였던 셈이다.
아이의 성장과 함께 등원 환경이 바뀌면서 우리의 일상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직장 어린이집은 생각보다 더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매일 도착하는 알림장에는 아이의 하루가 세밀한 수채화처럼 그려져 있었고, 매달 집으로 배달되는 놀이책은 아빠와 아이를 이어주는 다정한 징검다리가 되었다.
특히 정기적인 부모 간담회와 온라인 강연은 나에게 큰 전환점이 되었다.
전문가들의 조언을 통해 아이의 발달 단계를 머리로 이해하게 되자, 조급했던 마음에는 ‘기다림’이라는 여유가 싹텄다.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육아는 골방에 갇혀 혼자 끙끙대는 고립의 시간이 아니라, 전문가와 공동체라는 든든한 그물망 위에서 함께 자라 가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가을 운동회 날, 아이와 나란히 달리고 구르며 웃음을 터뜨리던 순간 문득 예전 공익광고의 카피 한 문장이 떠올랐다.
“부모는 먼 곳을 보고, 학부모는 눈앞을 본다.”는 말.
처음 아이가 태어났을 때 나의 바람은 투명했다.
그저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그거면 충분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아이가 사회의 일원이 되어가자 내 안의 욕심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조금 더 잘하기를 바라는 ‘학부모’의 마음이 ‘부모’의 본심을 가리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지금 어느 지점에 서 있는 것일까.
아이의 성취라는 결과물에 매몰되어, 정작 아이가 보내는 신호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이의 네 번째 생일 소원은 나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길이 막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속도에 대한 갈망이 아니라, 함께 하는 시간이 평온하기를 바라는 관계에 대한 소망이었다.
아이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목적지에 도착하는 시간이 아니라, 이동하는 차 안에서 아빠와 나누는 온기였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아이를 앞세워 등 떠미는 일이 아니다.
아이의 보폭에 맞춰 나란히 걷고, 때로는 멈춰 서서 길가의 들꽃을 함께 바라봐주는 일이다.
교육학자 마리아 몬테소리는 “아이를 돕는 일은 스스로 하게 하는 일이다.”라고 했다.
나는 여기에 한 문장을 더 보태고 싶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아이의 서툰 손길을 기다려주며 나 또한 어른으로 함께 성숙해 가는 일이라고.
아이의 생일 소원은 지금도 내 마음 깊은 곳에 이정표처럼 남아 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긴 여정 속에서도 늘 같은 소원을 빈다.
제발 길이 막히지 않기를, 내 앞길에 장애물이 없기를 바라며 산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정체 없는 고속도로를 혼자 질주하는 것보다, 때로 길이 막히고 정체될지라도 곁에 있는 사람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웃는 것이 훨씬 더 풍요로운 삶이라는 것을.
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결국 함께 가는 사람이며, 그 사람과 나누는 마음의 온도다.
아이 덕분에 나의 인생길도 조금 더 다정해졌다.
우리는 오늘도 그렇게, 서로의 손을 잡고 조금씩 함께 자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