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이 된 아이, 나를 다시 읽는 시간

함께 크는 매일 09: 팥칼국수 한 그릇에 담긴 무의식의 대물림

by 낙천지명

“아버님, 아이가 식판을 정말 깨끗이 비워요.”

어린이집 선생님의 칭찬을 듣는 순간, 나는 기쁨보다 묘한 생경함에 휩싸였다.

집에서는 입이 짧아 늘 애를 먹이던 아이였기에 그 말은 더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 찰나의 순간, 내 머릿속에는 까마득히 잊고 지냈던 마흔 해 전의 어린 내가 소환되었다.

나 역시 집에서는 좀처럼 밥그릇을 비우지 못하는 아이였다.

목장 일로 분주하셨던 부모님 대신 외할머니의 투박한 손길이 식탁을 채웠지만, 어린 취향과는 거리가 먼 어른들의 반찬들뿐이었다.

친구들의 화려한 도시락 반찬을 부러운 눈으로 훔쳐보던 소년.

가난해서가 아니라, 그저 온기가 그리웠던 그 시절의 나는 늘 허기진 마음으로 숟가락을 놓곤 했다.


할머니의 팥칼국수와 무의식의 입맛

유독 선명하게 기억나는 풍경이 하나 있다.

읍내 오일 장날이면 외할머니의 마른 손을 잡고 시장 구석진 곳의 작은 팥칼국수 집을 찾던 날이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진한 팥 국물, 그 안에서 쫄깃하게 씹히던 투박한 면발.

그곳의 눅진한 온기와 달큼한 향은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영혼의 음식이 되었다.

신기한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평소 접할 기회가 드문 음식임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팥칼국수를 한 입 먹더니 눈을 반짝이며 “맛있다!”를 연발하는 것이 아닌가.

아이의 작은 입으로 빨려 들어가는 붉은 국물을 보며 나는 전율을 느꼈다.

핏줄이라는 것은, 그리고 취향이라는 것은 가르치지 않아도 흐르는 강물 같은 것일까.

아이의 식습관에서 나의 무의식을 발견하는 순간, ‘아, 내 아들이 맞는구나’ 하는 안도감 섞인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닮지 않아도 좋을 것까지 닮아가는 기적

닮음은 때로 서늘한 자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내가 우유 냄새에 예민해 흰 우유를 멀리하는 것처럼, 아이 또한 우유를 권하면 질색하며 고개를 젓는다.

목장 일을 하셨던 부모님 곁에서 자라며 내 몸에 각인된 거부감이 아이에게도 고스란히 이식된 것일까.

억지로라도 먹여보려 애쓰는 내게 아이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아빠, 그렇게까지는 안 해도 돼.”

그 말은 마치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건네는 위로처럼 들렸다.

내가 싫어했던 나의 약점이나 예민함까지 닮아버린 아이를 보며, 나는 비로소 거울 앞에 선 부모의 무게를 실감한다.

아이는 내가 의식적으로 보여주는 모습뿐만 아니라, 나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내면의 그늘까지 흡수하며 자라고 있었다.


닮아도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은 기도

심리학자 칼 융은 말했다.

“당신이 무의식적으로 하는 것이 결국 당신의 삶이 된다.”라고.

아이 앞에서의 나 역시 그렇다.

내가 내뱉는 무심한 말 한마디, 식탁에서의 작은 태도 하나가 아이에게는 세상의 법칙이 되고 삶의 태도가 된다.

이제 나에게는 한 가지 단단한 바람이 생겼다.

아이가 나를 닮아갈 때, 그 닮음이 아이에게 짐이 아니라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완벽한 아빠는 될 수 없겠지만, 적어도 따뜻한 태도와 바른 습관만큼은 유산으로 남겨주고 싶다.

내가 할머니의 팥칼국수에서 사랑의 온기를 기억하듯, 아이도 훗날 우리가 함께한 식탁에서 든든한 신뢰를 떠올릴 수 있기를 바란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단순히 한 생명을 양육하는 일이 아니다.

아이라는 투명한 거울을 통해 나를 다시 만나고, 나의 굴곡진 부분을 다듬어가는 자기 구원의 과정이다.

아이는 오늘도 나를 닮아가고, 나는 그 아이를 보며 어제의 나를 고쳐 쓴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비추며, 조금씩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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