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라는 마라톤, 아이가 건넨 금빛 응원

함께 크는 매일 10: 숨 가쁜 질주 끝에 만난 뜻밖의 훈장

by 낙천지명

지난 금요일 퇴근길은 유독 발걸음이 가벼웠다.

현관문에 들어서자마자 아홉 살 아이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과 후 수업에서 만들었다는 당근 머핀을 내밀기 위해,

아이는 아빠가 오기만을 꼬박 기다렸다고 한다.

아이는 내 앞에서 머핀 위에 하얀 생크림을 정성스레 얹고,

직접 빚은 주황색 당근 장식까지 올린 뒤 수줍게 속삭였다.

“아빠, 이거 선물이야!”

투박한 모양새였지만,

그 위에는 아빠를 향한 아이의 순도 100% 사랑이 토핑 되어 있었다.

머핀 한 입에 달콤한 생크림과 쌉싸름한 당근 향이 퍼지듯,

고단했던 하루의 피로가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이 작고 소중한 순간을 어딘가에 꼭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가족의 오랜 기록 보관소였던 ‘라디오’가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거실의 TV를 치우고 흐르기 시작한 것들

아이가 태어난 직후, 우리 집 거실에서 TV가 사라졌다.

그 빈자리를 채운 건 나직이 흐르는 라디오 소리였다.

처음 몇 달은 그저 묵묵히 듣는 청취자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아이와 지내는 소소한 일상들을 사연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DJ의 따뜻한 음성으로 우리 가족의 이야기가 울려 퍼질 때마다,

거실은 작은 축제장이 되었다.

사연이 채택되어 받은 장난감, 화과자, 커피 쿠폰 같은 선물들은 우리에게 덤으로 찾아온 기쁨이었다.

복직 후에는 바쁜 일상에 치여 잠시 청취자로만 머물렀지만,

이태 전 아이의 감동적인 선물에,

사연과 함께 아이의 선물 사진을 보냈더니,

바로 라디오를 타고 흘러나왔다.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다는 의사의 경고에,
건강관리는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내와 아이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운동과 담을 쌓고 살던 나를 길 위로 불러냈다.
처음엔 2km도 버거웠지만,
차츰 거리를 늘려 한 달 후엔 8km를 달렸다.
내친김에 생애 첫 10km 마라톤 대회까지 신청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조깅을 시작한 지 석 달만에 51분이라는 기록으로 완주의 기쁨을 맛봤다.
좋은 기록은 아니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미 있었다.
하지만 진짜 마라톤의 끝은 골인 지점이 아닌 집 현관문이었다.
대회에서 돌아온 나에게 아이는 황금색 색종이로 정성껏 감싼 종이컵 트로피를 내밀었다.
종이 위에 크레파스로 꾹꾹 눌러쓴 ‘아빠 1등’이라는 글자를 보는 순간,
마라톤의 고통은 안개처럼 흩어졌다.
비록 투박한 종이 트로피였지만,
그것은 세상 그 어떤 금메달보다 묵직하게 내 마음을 눌러왔다.

나란히 걷는 삶, 함께 크는 매일

사연을 보낼 때, 어떤 신청곡을 듣고 싶냐는 나의 물음에

아이는 "아빠가 즐겨 듣던 '팬텀싱어' 노래!"라고 대답했다.

당시로부터 몇 해 전 함께 들었던 노래를 기억하고 있는 아이를 보며,

나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아이는 아빠의 취향을,

아빠의 도전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기록하며 함께 걷고 있었다는 것을.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는 말했다.

“인간은 타인에게 공헌할 때 자신의 가치를 실감한다.”라고.


그때 아이가 내민 종이컵 트로피와 지난 금요일의 당근 머핀은

내가 '충분히 좋은 아빠'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최고의 훈장이었다.

아이를 키우며 나는 나의 건강을 되찾고,

아이는 그런 아빠를 응원하며 자신의 우주를 넓힌다.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마라톤을,

하지만 '우리'라는 하나의 방향으로 함께 달리고 있다.

아이가 건넨 달콤한 머핀을 베어 물며 생각했다.

이 마라톤은 절대로 멈추고 싶지 않은,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경주라고.

brunch50.png Gemini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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