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불어오는 바람
매일 밤, 수없이 많은 논문들과 싸우며 지내던 아주 긴 시간들이 있었다. 밤은 늘 짧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아침 해가 뜰 무렵이면 모니터를 벗어나 가장 가까운 카페로 걸어가 커피를 마시며 새로운 날을 시작하던 쳇바퀴 같은 시간이었다.
아직은 어둑한 여름 새벽녘의 선선함을 즐기기 위해 커피점 가는 길을 조금 긴 코스를 시도했다가 금새 후회했다. 평소 활동량이 거의 없던 나는 약간의 오르막에도 지쳐버렸지만 이어폰을 끼고 걸으며 친구가 담아준 플레이리스트로 더워진 기분을 환기시켰다.
끝없는 내리막이 펼쳐지는 지점에 다다를때쯤 멀리서 무척이나 빠르게 반짝여오는 풍경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늘 보던 집 근처 바다 풍경이지만 그 날은 조금 다른 현실같았다.
저 끝에 있는 넓은 바다를 한눈에 내려다보니 강렬한 여름햇살은 짙은 바다색 위에 쉴새 없이 요동치는 빛을 만들고 있었다. 때마침 귀에서 들리는 플레이리스트는 웅장함을 모두 쏟아부은듯한 클라이막스 부분이 막 시작되었다..
눈앞의 역동적인 바다 색대비와 귀에 흐르는 화려한 음악이 묘하게 비현실적인 이질감 마저들었다. 뭔가 흘러가던 공기가 멈춘것 처럼 살짝 불안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 지브리 애니메이션 장면에서 보는 그런 거짓말 같은(?) 풍경이었다
몇초 가량이 지나고 조금씩 주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조깅 중에 멈춰서서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들 몇몇이 역광으로 흐리게 보였다.그리고 기찻길의 빨간 동그라미 신호등도 있었고, 또, 언제부터 불었을지 모를 약한 바람에 내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조금씩 살랑거리고 있었다. 그리 좋지 않은 바다내음도 불어왔지만 편안함이 감돌았다.
십여년이 지난 지금, 그 때 느꼈던 찰나의 불안감과 안도감이 요즘 바이올린 연습을 하며 가끔 떠오른다. 확실한 계기는 알 수 없지만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한지 일년이 된 지금 어떤 의미(구체적인 색과 느낌으로 만져지는)를 찾으려는 내면의 노력일지도 모른다.
나에게 오케스트라의 제 1바이올린은 그 때의 강렬한바닷가 풍경처럼 기억되고 제 2바이올린은 그 때 내게 불어온 잔잔한 바람인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