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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 Jan 29. 2020

임신 -n주 : 임신을 '결심'하기까지

결혼을 하기 전부터 나는 막연히 '나를 닮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원래 아기를 좋아하는 편이라서 '남의 아이도 이렇게 이쁜데 나 닮은 내 아이는 얼마나 이쁠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있었다. 결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이유 중에 하나도 나를 닮은 아이를 낳고 싶어서였다. 아이는 나 혼자 낳을 수가 없으니까. 이왕이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나를 닮은 아이를 낳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결혼을 하게 된 남편도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우리 부부에게 임신과 출산의 여부는 크게 고민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런데 임신과 출산의 시기를 구체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하면서 남편과 나는 여러 번 답 없이 삐걱거렸다.


남편은 나의 건강과 태어날 아기의 건강을 이유로 우리가 하루라도 젊을 때 아기를 낳자는 의견이었지만 임신과 출산은 오롯이 내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내 의견을 전적으로 존중하겠다고 말했다. 내가 아기를 갖겠다고 결심한 시점에 아이를 가지자고. 하지만 너무 미루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고.


물론 나 역시 체력이 될 때 아기를 낳고 키우고 싶었기 때문에 마냥 임신을 미루고 싶지만은 않았다. 1년 정도는 신혼을 즐기고 아이를 가져야지!라는 내 마음속의 막연한 데드라인이 점점 다가오기 시작하자 막연하기만 했던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에 대한 현실적이 고민들이 쓰나미처럼 몰려오기 시작했다.


아이를 낳으면 육아는 어떻게 할 것인가? -> 육아를 내가 전담으로 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내가 육아를 전담하지 않으면 육아를 도와줄 수 있는 인프라가 서울에는 전무하다. (지인이나, 가족이 없음)

아이를 내가 전담으로 키우면 남편이 외벌이로 재정적인 문제를 책임져야 하는데 지속적으로 남편 혼자 외벌이로 가정경제를 책임질 수 있는가? -> 서울에서 살아야 한다면 맞벌이가 필수이다. (특별히 거주지 문제에 있어 맞벌이가 필수다.)

아기가 태어나면 맞벌이를 유지할 수 있는 상황인가? -> 힘들 것으로 예상한다.

장기적으로 아이를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에서 키울 수 있는가? ->  쉽지 않다.


이런 현실적인 고민들에 대한 결론이 나기도 전에 내 개인적인 고민들도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이를 키우는 상황을 거의 배려해 주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 및 여러 제도 속에서 회사를 다니면서 아이를 키우는 삶을 내가 기꺼이 감당할 수 있을까?

임신과 출산은 어찌어찌하더라도 육아에 있어서는 나의 일과 커리어를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이 과정을 겪으면서 내가 나를, 상황을, 환경을, 아이를, 남편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모든 것이 머릿속에 쏟아지기 시작하면서 이 모든 고민들을 생각하는 것 만으로 나도 모르게 억울한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왜 나만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가, 왜 이런 고민의 주체는 여자인가, 임신과 출산을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임신과 출산이라는 생물학적 이벤트만으로도 여자가 신체적, 건강적으로 포기해야 할 것이 이렇게나 많은 것인가 등등. 모든 생각들이 뒤섞이면서 아이를 낳겠다는 내 생각이 너무나도 천진난만하기만 했던 건 아닌지, 무슨 생각으로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건지 스스로를 부정하고 원망하는 수준까지 갔다.


멘탈이 이지경으로 혼돈의 카오스가 되다 보니 이 주제로 남편과 이야기할 때마다 대화의 결말은 남편에게 '너는  모른다'며 혼자서 온갖 억울함을 쏟아내는 쪽으로 흘러가기 일쑤였다. 내가 억울해하며 원망 섞인 말들을 한참 늘어놓기를 반복할 때마다 남편은 임신과 출산은 당연히 여자인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 매우 크겠지만 이 아이가 태어나는 일은 '우리'의 일인데 왜 본인을 타자화 시키냐며 서운해했다. 내 이기적인 태도에 남편이 서운함을 성토할 때마다 나는 그깟 서운함은 내가 감당해야 할 수많은 고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냐는 식으로 터부시 했었다.


그때의 나는 내가 감당해야 할 것으로 예상되는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미리 곱씹어보면서 불행해하느라 남편의 입장을 헤아려줄 만큼 마음이 넓은 상태가 못됐다. 하루는 약속시간 전에 잠시 들른 스타벅스에서 어쩌다 보니 터진 나의 임신 출산 관련 악다구니(내가 제일 피해자야!! 내가 제일 손해 본다고!! 나만 불행해!!)를 듣던 남편이 폭탄선언을 했다.


'그렇게 힘들고 싫으면, 아이를 안 가져도 돼! 나는 자기랑 행복하게 살고 싶어 결혼한 거지 아이를 낳으려고 결혼한 게 아니에요.'


겪어보지도 않은 임신, 출산, 육아를 상상하면서 내가 잃어야 하는 것들을 곱씹으며 받는 스트레스로 폭주(?)하던 나를 멈칫하게 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를 갖지 말자'라는 말이었다. 오히려 그날 스타벅스에서 어퍼컷을 한 대 맞으니 정신이 좀 맑아졌다. 가만히 생각해봤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게 뭐지?'


아이를 선택하면 잃어야 할 것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회사와 일에 대해서 생각했다.

회사를 다니면서 돈을 벌고, 커리어로 나의 위치를 찾고 스스로의 자존을 높이면서 사는 것. 좋다. 당연히 좋다. 일로 말미암아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들이 분명히 있었다. 일에 몰두하고 그 일에 대해 보람과 의미를 느끼면서 성과를 확인하는 순간들은 분명히 즐거웠다. 


그런데 그 이면에는 강렬하게 상처 받았던 순간들도 많았다. 이해할 수 없고 나를 존중하지 않는 의사결정들에 상처 받으면서 보냈던 시간들, 여러 가지 갈등 상황들에 치여서 정신과 육체가 점점 정상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끼고 병원을 오갔던 순간들. 그 시간이 지나고 나서 내 건강은 어떻게 됐더라?  건강도 건강이지만 나는 행복했나? 무엇보다도 회사와 회사에서 하는 일이 아니면 스스로의 자존을 찾지 못하는 내 모습은 내가 원하는 모습이었나? 아니었다.


일에 대해서는 고민이 일단락되었으니 아이를 낳느냐 낳지 않느냐에 대해서 고민해봤다. 나에게는 아이를 낳는 것이 이유도 없이 당연했으니, 반대로 아이를 낳지 않은 삶을 생각해 봤다. 나는 남편과 지내는 지금의 삶이 죽을 때까지 지속된다고 생각하면 그다지 기대되는 것이 없었다.(이것은 내 결혼생활이 불행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결혼을 고민할 때 내가 나에게 집중하며 사는 삶에 더 이상 기대가 없어서 결혼을 생각했던 것처럼, 나는 남편과 나, 우리 둘만이 만들어 내는 삶이 지속됐을 때 상상되는 큰 기대가 없었다. 대표적으로 돈이라는 변수를 극한으로 보냈을 때 돈과 여유로운 환경들이 주는 좋은 요소들이 나와 내 남편에게 집중되는 삶은 나에게는 별로 기대되는 삶이 아니었다. (나중에 이 글을 보고 내가 얼마나 후회할까 걱정되기도 한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내 아이를 갖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아이를 낳는 것에 대한 기대감으로 확장됐다. 무채색에 가까운 내 인생의 스펙트럼을 훨씬 다양한 색으로 채울 수 있을 것 같다는 그런 기대감. 

내 인생에 아이가 등장하게 되면 상상하지 못한 좋은 것도 있을테고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도 있을테지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지금 내 삶에서 예상 못하는, 내가 기대할 수 있는 영역이 생긴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의미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아이를 낳는다면 내 아이에게 할 수 있는 한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함께 자라는 것. 할 수 있는 한 아이의 많은 순간들을 함께 공유하며 살고 싶었다.  


여러 가지 방면으로 이리저리 고민한 끝에 내가 원하는 것, 내게 중요한 것이 겨우겨우 일단락되었다. 내 아이와 더 많은 경험을 함께 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 이 바람보다 회사와 일이 더 중요하진 않다고 어찌 저지 결론이 났다. 이렇게까지 생각을 정리하고 나서야 나는 겨우 남편에게 화내지 않고, 억울해하지 않고 '아이를 갖자'라고 차분히 이야기할 수 있었다. 치열하게 혼자 스스로를 수십 번이고 치고 박은 뒤라서 그런지 회사를 정리하고 이사를 하기까지 큰 고민 없이 실행할 수 있었다.


물론, 퇴사와 거주지 이전 후에 내가 감당해야 할 것들은 내 생각보다 훨씬 구질하고 치사하고 버거웠지만, 아직까지는 아직은 임신을 결심하고 , 내가 기대하는 삶의 모습을 이루기 위해 움직인 것을 후회하진 않는다.


앞으로 내 기대와 예상을 벗어난 어떤 것들이 나를 후려칠지 걱정되지만, 뭐 한번 해보지 뭐. 까짓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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