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한자와 나오키'와 일본인의 여성상
'한자와 나오키'라는 일본 드라마를 아시는가?
2013년 방영된 시즌 1은 40%를 넘는 경이로운 시청률을 기록하였으며, 드라마에서 주인공 '한자와 나오키'가 외치던 'やられたらやり返す。倍返しだ!(당한 만큼 갚아준다. 두 배로 갚아준다!)는 그 해의 유행어 대상으로 선정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거렸다.
일단 이 드라마, 재밌다. 은행원 한자와 나오키가 은행의 부조리에 맞서 싸우며 상사의 비리 등을 파헤치는데, 그 과정이 일단 흥미진진하다. 비리를 밝혀내려는 한자와와, 그를 저지하려는 일련의 악당 상사들, 몇 변의 시련을 겪고, 시청자의 심장을 조였다 내려놓았다를 반복하다가 결말은 한자와의 승리로 통쾌하게 마무리한다.
2020년 7월부터는 시즌 2가 방영되기 시작했는데, 역시나 높은 시청률을 구가하며 주목을 모으고 있다.
나와 남편 또한 한자와 나오키를 좋아하는데, 드라마가 방영되는 일요일은 9시 본방 사수를 위해서 아이들과 열심히 몸으로 놀아준다. 그런 다음 9시 전에 둘을 재우고 맥주를 들고 텔레비전 앞으로 간다. 시즌 2 또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한자와 나오키는 여전히 정의롭고 날카로우며, 악당들은 익살맞을 정도로 악당답다. 스토리야 말할 것도 없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다가 한자와 나오키가 통쾌하게 승리한다.
그런데 말이다. 묘하게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
한자와 나오키의 부인 '하나'다. 항상 밝고 똑 부러지고 상냥하다. 아, 물론 예쁘기도 하다. 아이는 없고 부부 둘이 살고 있다. 그런데 말이다, 한자와 나오키는 바쁘다. 일도 해야지, 상사의 비리도 밝혀야지, 그러기 위해서 동기들과 정보 교류도 해야지, 이래저래 할 게 많다. 야근은 일상이다. 하나는 저녁 늦게 들어온 남편에게 따끈한 밥을 차려준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아 다정한 눈으로 '당신, 요새 젊었을 때 의욕에 넘치던 무렵의 눈을 하고 있네. 응원할게' 같은 말을 한다. 게다가 때로는 야근하고 있는 남편을 위해 도시락을 싸서 회사에 가져다준다. 물론 예쁘게 화장하고 차려입고 말이다.
게다가 평일에는 회사 임원 부인들과의 런치 모임에 참석해 남편을 위해 정보 수집을 한다. 물론 그 정보는 한자와 나오키가 악당 상사에게 통쾌한 복수를 하는 데에 중요한 키가 된다.
정점은 따로 있다. 결혼기념일을 위해 유명 레스토랑을 몇 달 전부터 예약해 둔 하나, 예쁘게 차려입고 나갈 준비를 하는데 남편에게 전화가 걸려 온다. 한자와 나오키는 말한다. "미안, 지금 정말로 중요한 시점이거든. 정말 미안해. 내가 나중에 꼭 갚을게." 부인은 "뭐라고? 레스토랑 예약하기 힘들었는데. 어쩔 수 없지. 일이 중요한 거지? 나는 오늘 그럼 친구들이랑 놀아야겠다."라고 말한다. 중요한 건 어조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말투. 짜증이나 분노는 전혀 묻어있지 않다. 심지어 마지막에는 웃음기가 어려있다.
아, 물론 안다. 나도 저런 부인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일에서도 승승장구할 것만 같다. 그런데 결혼기념일 약속을 취소했는데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나? 예쁘게 화장하고 차려입고 나가려는 참에? 저렇게 아량 있게 단번에 괜찮다고 말할 수 있나? 저렇게 뒤끝이 없을 수 있나?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고 누군가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한자와 나오키의 부인을 보면서 떠올렸다. 어렸을 적 동화책에서 읽었던 백마 탄 왕자님. 키 크고 인물 좋고 집안 빵빵하고 부자인 데다가 나만 사랑해주는 로맨틱한 남자. 그리고 현실에서는 만날 수 없는 그런 사람. 이 드라마는 그런 사람을 현실인 것처럼 버젓이 그리고 있지 않은가? 물론, 하나는 인간적으로 그릇이 넓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저렇게 너그러운 사람이 될 수 있었으면 하고 나도 생각한다. 그런데 그 안에 그 여성의 감정은? 기분은? 의지는?
아, 물론 이 드라마의 전제는 일본의 버블 호황기이다. 30년은 전의 일이다. 시대가 다르다고 변명할 수도 있다. 그런데 말이다, 문제는 이 드라마가 이 시대에 방영된다는 것이고, 게다가 너무 재미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재미 때문에 이 드라마에 빠져들 것이고, 아무런 저항 없이 이런 설정을 받아들이지는 않을까?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배우자가 저런 여성이기를 바라지는 않을까? 나조차도 그럴 뻔했기 때문이다.
별 것 아닌 일을 꼬투리 잡는 성격이 재밌는 드라마마저 삐딱하게 보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