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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솔비 Aug 11. 2020

학군(學群) 보고 이사하기?

좋은 학교, 좋은 교육이란?

  이런저런 이유로 집을 사기로 했다. 어떤 집이 좋을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미지가 없었던 나와 남편은, 일단 많이 보기로 했다. 그날도 우리는 아이 둘을 데리고 매물로 나온 집을 보러 갔다. 공인 중개사 분은 조건에 맞는 물건을 소개해주겠다며 우리에게 이것저것 물었고, 마침 근처에 나온 좋은 조건의 집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그 집은 〇〇 초등학교 학군이라 인기가 많아요."


  일본에는 유명 공립 초등학교가 있다. 좋은 학교라 일컬어지는 이유 중의 하나는 높은 사립중학교 진학률에 있다. 일본의 사립 중학교는 연간 200만 엔을 훌쩍 넘는 높은 학비와 그에 걸맞은 교육 수준을 자랑하는데, 대부분은 같은 재단의 사립 고등학교에 자동으로 진학하며, 명문대 진학률도 높다. 그렇기에 사립 중학교 수험을 준비하는 아이의 대부분은 높은 학비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세대 수입이 높은 집의 아이이다. 즉 유명 공립 초등학교 학군에 사는 아이들은 부모들의 세대 수입이 높고, 그렇기에 교육관이나 가치관이 비슷한 경우가 많다. 또한 사립 중학교 수험을 준비하는 학생이 많기 때문에 면학분위기도 조성되어 있다. 그렇기에 부동산 사이트에서는 초등학교 학군별 매물을 검색할 수 있고, 유명 부동산 컨설턴트는 '아파트를 사려면 학군을 보고 사라'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물론 아이가 좋은 교육을 받고 좋은 학교에 다니면 좋을 것이다. 그런데 좋은 학교라는 게 무엇인가. 사립 중학교 진학률이 높은 학교이다. 그만큼 중학교 수험을 준비하는 아이의 비율이 높다. 많은 아이들이 초등학교 2, 3학년 무렵부터 입시학원에 다니며 수험 준비를 한다.

  좋은 학교란 무엇이지? 내가 아이에게 주고 싶었던 교육 환경은 무엇이지? 나는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기를 바라지?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시켜야 하지? 무엇이 중요하지? 그동안 막연하게만 생각해왔던 것들을 조금씩 구체화해야 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단단히 생각해두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아무 생각 없이 주변 사람들 따라 아이를 입시 학원에 보낼 것만 같았다.






  나는 내 아이들이 자기만의 가치를 찾아 주체적으로 살아가기를, 그 삶 속에서 재미와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그리고 더불어 살아가기를 바란다. 안다. 어디 교과서에나 나올법한 이야기인 걸. 저렇게 되길 안 원하는 부모가 어딨어?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많을 것 같다. 하지만 늘 방법이 문제다. 저렇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나는 내 삶 속에서 끊임없이 모색 중이고(나도 아직 그 단계가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아이들을 교육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한다.


  그리고 나는 그 방법이,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한 입시 교육에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은 입시교육에 열중해온 내 삶 속에서 무언가 부족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모범생이었다. 공부하는 게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재밌기도 했다. 책도 즐겨 읽었고 누가 안 시켜도 알아서 공부하곤 했다. 특목고도 가고 명문대도 갔다. 그런데 대학에 오고 나니, 내가 지금까지 한 공부가 뭐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막연히 꿈꿔왔던 외교관, 변호사 이런 직업들이, 정말 내가 원해서 갖게 된 꿈인지, 그저 남들이 좋다고 하니까, 성적 좋은 애들은 그런 거 한다고 하니까 선택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지금까지 해 온 공부 중에 '나'는 있었나 싶었다. '내'가 행복해지기 위한 공부는 있었나 싶었다.


  두 번째 이유는, 시대는 변한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 나 대학 때는 기업 인사팀들이 정문 밖에서 기다리다가 대화 몇 마디 나누고 우리 회사에 들어오지 않겠냐고 제의했다고. 좋은 대학 졸업장이 취직을 보장해주고, 행복한 삶을(행복할 거라고 누구나 믿는 삶을) 선사해주는 시절이 있었다. 그렇기에 우리 부모세대 들은 명문대 입학을 목표로 우리를 열심히 교육시키셨을 것이다. 그런데 요새는 어떤가? 명문대 졸업장이 취직을 보장해 주던가? 행복한 삶을 선사해주던가?

  인공 지능 시대가 온다고들 한다. 지금 있는 직업들 중 많은 직업들이 인공지능에 의해 대체될 것이라고도 말하고 basic income이 보장되는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고도 한다. 코로나 또한 우리의 삶을 뒤흔들고 있다. 우리는 거대한 변화의 한가운데에 있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 올 시대에 갖추어야 할 중요한 능력 중의 하나가 '재미와 의미를 찾아내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자 하는 공부가 과연 '재미와 의미를 찾아내는 능력'을 길러주는지 의문스럽기 그지없다.


  "원트 want에서 라이크 like로 행복의 척도가 바뀐다. 코로나 19 사태를 낳은 지금의 문명은 사회가 주입한 경쟁, 비교의 원트를 기반으로 한다. 원트에는 만족감이 없고 무한 욕망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원트를 정당화하고 제도화한 문명은 원트를 더 갖기 위해 찌르고 파괴했다. 인류는 사회가 심은 원트가 아닌 내가 정말 좋아하는 라이크로, 새로운 행복의 척도를 위해 나아갈 것이다. 라이크는 만족감을 낳는다.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에 에너지를 쏟고, 더 작은 것으로 함께 공존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만든다."                                                            -김경일 외 7인, 코로나 사피엔스, 인플루엔셜



  세 번째는, 경쟁 속에서 과연 우리는 더불어 사는 삶을 배울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두 아이를 키우다 보니, 비록 아직 둘 다 어리지만, 두 아이의 특성이 다르다는 게 눈에 보인다. 각자 잘하는 것, 즐겨하는 것이 다르다. 누구나 각자 자신만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는 하나의 레일만을 제시하고 한 가지 기준으로 학생들을 경쟁시킨다. 그런 경쟁 속에서 아이들은 때론 소외되고, 주변을 돌아볼 여유를 가지지 못한 채 살아간다.

  경쟁은 효율적인 시스템이다, 경쟁이 없는 사회주의 사회를 봐라. 발전이 없지 않나. 우리는 오랜 기간 이렇게 배워왔다. 그런데 경쟁이 없이도 이 사회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김누리 교수는 독일의 예를 들며 말한다.


  경쟁을 당연시하는 한국과는 달리 독일에서는 경쟁을 부정적인 원리로 봅니다. 이런 사례로서 독일의 학교 교육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독일의 경우는 학교에서 경쟁을 시키지 않습니다. '경쟁 교육은 야만이다'라는 생각이 이미 1970년대 독일 교육 개혁의 기본 원리였습니다.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아이들을 경쟁시켜선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경쟁 이데올로기가 극단화되면 또다시 나치즘 같은 야만을 낳을  있다고 보았습니다.  나치즘의 핵심은 아리안 족이 가장 우수하고 유태족이 가장 열등하다는 식의 차별 의식과 우열 사고이고,  바탕에는 경쟁의식이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에서 경쟁을 시키거나 경쟁의식을 부추겨서는  된다는 것이지요. 지금도 독일 학교에서는 등수를 매기기가 우열을 나누지 않습니다.                                                                    -김누리,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해냄출판사 


   실제로 독일의 대학은 아비투어라는 고등학교 졸업 시험만 보면 누구나 갈 수 있는데, 의대처럼 인기가 많은 학과도 시험 성적 100%로 가는 것이 아니라, 아비투어 성적 20%와 의대에 가기 위해 몇 년을 기다려 왔는지 를 보고 학생을 선발한다고 한다.(정원에 제한이 있기 때문에. 선발방식은 주마다 다름) 그리고 재밌는 사실은, 아비투어 성적이 좋아서 들어온 학생들과 인내심을 갖고 기다린 끝에 입학한 학생들을 비교해보면, 대기 끝에 들어온 아이들이 졸업 후에 더 훌륭한 의사가 되었다는 연구 결과가 많다고 한다.



  우리는 혼자 사는 게 아니다.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서, 인정받기 위해서 욕망하며 사는 삶이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 줄까?

  지위고하와 상관없이, 성공 여부를 막론하고 사람은 죽을 때 이런 후회를 합니다. "그 친구한테 더 잘할걸." "그 사람한테 더 잘해줄걸."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보람이라는 건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잘 지내온 흔적, 다른 사람과 공존한 삶의 흔적이란 얘기입니다.                      -김경일 외 7인, 코로나 사피엔스, 인플루엔셜





   나는 일본에 살기에 가끔씩 한국에 갈 때면 한국 동화책을 잔뜩 사서 돌아오곤 한다. 이 연령대의 아이들은 무슨 책을 읽나 검색해보면, 그 또한 하나의 커리큘럼 같아서 놀랄 때가 있다. 생활동화, 인성동화부터 시작해서 수학동화니, 자연 관찰 동화니, 창작 동화니, 좀 더 크면 과학 동화, 경제 동화 등등 분야가 갈수록 세분화된다. 한창 인터넷에 빠져 그런 글을 보고 있자니 이거 꼭 다 찾아서 읽혀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생각한다. 책이란 게 그런 건가? 아이들은 인성 동화 속에서 나온 개구리를 보면서도 상상력을 늘려가고 자연에 대한 흥미를 넓혀간다. 물론 다양한 책이 있으면 좋겠지만, 인성동화를 읽혀야 아이의 인성이 바르게 형성되는 건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렇더라. 인터넷에서 몇몇의 글을 읽었을 뿐인데 혹하더라. 아직 내 아이는 만 세 살이 막 되었을 뿐인데 이런 고민을 하는데 앞으로는 어떨까 싶더라. 내 아이는 이렇게 교육시켜야지 하고 평소에 마음먹고 있더라도 주변 사람들 다 하고 있다고 하면, 그들 나름의 논리로 그들이 왜 타당한지 설명하면, 내가 잘하고 있는지 자꾸만 묻게 될 것 같았다.


  게다가 내가 아이를 이렇게 키우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친구가 내게 해 준 이야기가 귓가를 맴돌기도 한다. 자기가 다닌 중학교는 그다지 좋은 지역의 중학교는 아니었는데, 공부 좀 하려고 하면 또 공부하냐는 식으로 비아냥거리는 아이들도 많았고, 수업시간에 선생님께 계속해서 대들어서 선생님을 울리는 아이들도 있었다고. 자기는 특목고에 와서 그런 일들이 없어서 너무 좋았다고.


  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상은 현실과 매번 부딪힐 거라는 걸. 단순히 입시 학원에 보내지 않는 것이 정답이 아니라는 걸. 구체적인 대안은 아직 그 무엇 하나 떠올리지 못했다는 걸. 그래서 나는 여전히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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