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맘의 워라밸
결혼하기 전 같이 일하던 직장 선배 중에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여자 선배가 있었다. 선배는 9시 20분부터 16시까지 단축근무를 했는데, 그녀는 그 시간 동안 말 그대로 폭풍처럼 일했고, 그런데도 늘 웃고 있었다. 취미로 하던 복싱을 너무 잘한 탓에 프로로 데뷔하지 않겠냐는 제의까지 받은 적이 있다는 선배는, 통근시간 지하철 안에서도 서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는 터프하고 강한 여성이었다.
당시엔 육아와 일을 병행한다는 게 어떤 일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고, 나는 그저 의례적으로 "육아와 일 병행하는 거 힘들지 않아요?" 하고 선배에게 물었다. 선배는,
"아니, 난 오히려 이게 맞는 거 같아. 일 스트레스는 육아로, 육아 스트레스는 일로 풀고 있어, 하하하."
하고 호탕하게 대답했다.
육아가 어떤 것인지 아무것도 알지 못하던 그 무렵, 난 그 말이 그녀의 터프함에서 오는 거라고, 강인한 정신력에서 오는 그녀만의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어느덧 나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재킷을 걸치고 구두를 신고 출근을 한다.
그리고 그녀의 말이 다시금 떠오르기 시작했다.
예전에 회사에 다닐 때는 일하면서 받은 스트레스를 그대로 안고 집에 돌아왔다.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일을 걱정하고, 그 일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지를 두려워하고, 내뱉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말들을 후회하고, 앞으로 닥쳐올 일들을 미리 당겨와 머릿속에서 재생하며 피로해하곤 했다. 이미 일어난 일은 후회한다고 바뀔 일도 아니었고, 앞으로 일어날 일은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데 육아와 일을 병행하게 되고 나서는 말이다, 걱정 따위 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일단, 몸이 바쁘다. 어린이집에서 아이 둘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와, 서둘러 목욕을 시키고, 저녁을 대강 준비하고, 밥을 먹이고, 설거지하고, 놀아주다 보면 금방 잘 시간이다. 가만히 앉아서 걱정을 하는 건 사치에 가까울 정도이다. 아이 둘을 재우고 나서야 남편과 나에게 겨우 휴식시간이 주어진다. 이 귀중한 휴식시간을 쓸데없는 걱정으로 낭비하고 싶지 않아 진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시간만은 즐거우리라 다짐을 하고 휴식을 취한다.
물론 사람 갑자기 변할리 없다. 지금도 저런 바쁜 생활 속에서도 걱정거리는 틈틈이 머리를 스친다. 하지만 예전과 다른 게 있다면, 걱정해도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계속 마음에 담아두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육아 덕분에 예전보다는 수월하다.
일을 할 때도 그렇다. 일할 수 있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 보니 집중해서 효율적으로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당연한 이야기이긴 한데, 예전에는 늦게까지 야근을 하는 게 성실함의 상징인 회사이기도 해서, 시간 안에 다 못 끝내면 야근하면 되지 하는 생각이 기본으로 깔려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매일매일이 마감이나 다름없다. 한정된 시간 안에 일을 끝마치기 위해서는 일을 할 때 더 효율적인 방법은 없을까, 습관적으로 하고 있는 이 일이 정말 필요한 일일까? 다른 방법은 없을까? 생각하면서 일을 한다.
게다가 일을 할 수 있는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게 느껴지는지 모른다. 아이들과 있는 시간은 행복하지만, 늘 웃음이 넘치는 건 아니다. 때로는 지치고, 때로는 잠깐만이라도 좋으니 벗어나고 싶기도 하다. 3년간 육아휴직을 하면서 나만의 시간을 얼마나 갈망했는지 모른다.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는 것 자체가 기뻤고, 엄마가 아닌 나로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 자체에 감격했다. 그 소중한 시간을 대강 쓸 수는 없다.
물론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건 힘들다. 가끔은 집에 와서 혼자 맥주를 마시며 미드를 보던 날이 그립기도 하다. 가끔은 쏟아지는 일에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한다. 그래도 예전처럼 야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 공허하다거나, 하루 종일 두 아이를 돌보다 지쳐서 별 것 아닌 일로 아이에게 짜증을 내거나 하는 일은 없어졌다.
아, 선배가 이야기하던 "육아 스트레스는 일로, 일 스트레스는 육아로 푼다"는게 이런 거구나,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