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이유
"화난 건 아닌데,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기대하던 게 충족되지 않아서 생기는 감정인데, 그렇다고 상대방이 싫은 건 아니다? 싫으면 이런 감정이 생기지도 않아. 그러니까 음.. 예를 들어서 당신 친구 쥰페이 있지? 걔가 오랜만에 모이자고 친구들한테 연락을 했는데 당신한테 깜박하고 연락을 안 했어. 그럼 기분이 어때?"
"응? 깜박했나 보다 생각하지."
"아니, 그게 아니라, 화나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에이 모르겠다."
남편과 나 사이에 종종 일어나는 대화이다. 나는 '서운하다'라는 감정을 설명하려고 손짓 발짓 다 하고, 갖은 비유와 예를 들지만, 내 설명이 남편에게 얼마나 와 닿았는지는 의문이다. 나의 부족한 일본어 실력 탓도 있으나, 일본어에는 나의 다이내믹한 감정을 적확히 표현할 단어가 부족한 것만 같다. '정 떨어진다', '갑갑하다', '속 터지겠다'라는 말도 어떻게 말해야 할지 한참을 머리를 굴린다. (쓰고 보니 예가 죄다 내가 부부 싸움할 때 쓰는 말이라 부끄럽다.)
외국어를 배우다 보면 누구나 느끼겠지만, 언어와 언어 간에 정확히 일대일 대응하는 단어는 그리 많지 않다. '서운하다'라는 말을 쓸 자리에, 일본에서는 상황에 따라 다른 말들을 골라 쓴다. 한국어의 '서운하다'의 사용 범주에 딱 들어맞는 단어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운하다'라는 단어가 생기지 않은 이유가 그들의 문화 속에는 있을 것이다.
언어는 개념을 형성한다. 언어가 없으면 개념 또한 없다. '서운하다'라는 말이 있기에 우리는 '서운하다'는 감정을 느낀다. 내가 느끼는 감정 또한, 내가 쓰는 언어에서 기인한다. 그렇기에 언어를 습득한다는 것은 또 하나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영어보다 한국어를 먼저 가르친다.
나의 아이들은 일본에서 생활하며 일본 어린이집을 다닌다. 아빠도 일본어밖에 할 줄 모른다. 아이들은 일본어를 모국어로 쓰며 자라게 될 것이다. 그런 아이들에게 나는 한국어를 가르치기 위해서 꾸준히 한국어로 말을 걸고, 한국어 책을 읽어주며, 한국어로 대화한다.
나는 아이들이 세상을 보는 다양한 시각을 갖기 원한다. 똑같은 현상도 다르게 해석될 수 있고, 받아들이는 방법은 다양하다는 걸 아이들이 알았으면 한다. 영어를 배우면 더 좋지 않나 생각하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내가 모국어로 쓰는 한국어야말로 내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나는 영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하지 못한다. 내가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친다 하더라도, 내가 모국어로 쓰는 한국어 레벨에 다다르지는 못할 것이다.
뇌 연구자들에 따르면, 아직 충분히 뇌가 발달되지 않은 상태에서 7세 이전 아이들에게 언어에 대한 과도한 학습을 하게 하는 것은 아이들의 뇌가 정상적으로 발달하는 데 지장을 줄 수 있다고 한다. 자연스러운 이중 언어 환경이 아니라면, 자녀들은 부모의 언어를 먼저 충분히 익혀야, 풍부한 정서와 창조적 뇌를 발달시킬 수 있다. 또한 모국어를 잘 배워야 외국어도 잘 배울 수 있다. 이중 언어 환경이 아니라면, 외국어는 모국어에 대한 충분한 습득과 깊이 있는 이해를 바탕으로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성조, 그래도 행복해 그래서 성공해, Inspire(영감의 언어)
하지만 사실, 그런 이점은 다 제쳐두고, 내가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가장 큰 이유는 내 욕심, 내 행복을 위해서이다.
난 내 아이들과 한국어로 대화하고 싶다. 내가 느낀 바를, 내가 생각한 바를 그대로 전달하고, 그대로 이해받고 싶다.
사실, 한국어를 가르쳐야지 마음먹은 건 선택도 뭣도 아니었다. 일본에서 10년 가까이 살았지만, 나는 한국어 베이스로 생활한다. 물론 남편과도 일본어로 대화하고, 직장에서도 일본어만 쓰고, 일본어로 된 책도 읽고, 일본어로 된 문서도 작성한다. 머릿속에 한국어를 먼저 떠올리고 일본어로 번역하며 말하는 것도 아닌다. 일본어로 말할 때는 일본어로 생각하고 말을 한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한국어로 된 감정을 느끼고, 한국어로 된 감정을 표현한다.
내 감정을 내 아이들이 부연설명 없이도 이해해줬으면 하고, 나 또한 아이들의 다양한 감정을 이해하고 싶다. 그래야 아이들과 더욱더 깊이 소통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래야 아이들과 더욱더 깊이 삶을 공유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래야 아이들과 내가 더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부모 자신의 언어를 먼저 가르치자고 제안하는 것은 이런 언어 능력보다는 부모와 자녀 간의 행복에 방점이 있다. 미국에서 20년 동안 살면서, 남부럽지 않게 이민생활을 하고 있는데 왠지 삶이 외롭고 슬퍼 보이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이민 와서 정신없이 일하고 정착하다 보면, 아이들은 어느새 한국말이 익숙하지 않은 미국 사람으로 훌쩍 커버린다. 생각하는 방식도 다른 데다가 언어도 통하지 않으니 점점 서로 대화하지 않게 되고, 친밀함이 없는 형식적인 관계로 살아가는 것이다. 반면 자녀가 어느 정도 한국말로 소통이 가능한 부모들은 자녀가 성장하고 독립한 후에도 대부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성조, 그래도 행복해 그래서 성공해, Inspire(영감의 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