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병 여동생에 대한 편집증 오빠의 일기
동생은 초등학교 때 경계선 지능 장애를 진단받았습니다. 진단처럼 동생은 초등학교 6학년 이후로는 더 이상 자라지 못한 것일까요? 당시에는 이게 딱히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나 역시 더 이상 자라지 못했으니까요. 긴 학창 시절과 사회생활을 간신히 견뎌내었던 내 삶이 마치 씨앗조차 없는 빈 화분에 끝없이 물을 주고 있는 모양새와 비슷하다 느껴졌던 시절이었으니깐.
어쩌면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이 저보다 더 나을지도 모른다 생각했습니다. 어렸을 적 동생에 대한 기억은 희미합니다. 동글동글하고 순하게 생겨서 과자나 우유를 좋아했다는 것 말고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내가 중3 때 동생이 태어났으니 동생이 아기였을 때 저는 학업으로, 대학으로, 군대로, 회사로 늘 집 밖을 떠돌아다녔습니다.
다른 집들처럼 화목하지 못했던 집에 마음 둘 곳이 없었던 저는 마치 가족이 없었던 것처럼 밖으로 돌았습니다. 그 안에 어린 동생이 있다는 생각조차 잊어버린 채. 동생이 중3이 되던 날, 동생은 더 이상 학교에 가기 싫다고 등교를 거부하고 나서야 동생이 문제를 겪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동생은 오랜 시간 친구들한테 왕따를 당했다고 합니다.
놀림받고 발로 차이고. 말이 느리고 언어가 능숙하지 않았던 동생은 선생님께도 집에도 자신이 겪고 있는 처지와 감정을 제대로 말하지 못했을 겁니다. 동생은 학업이 뒤처지고, 여러 어리숙한 행동으로 집에서 부모님께 참 많이 혼났었는데, 학교에서 아이들한테 훼손당하고 집에 와서도 훼손당했던 동생의 초중고 12년은 아마도 길고 긴 외로움과 괴로움으로 점철되었을 겁니다.
되돌아보니 어린 여동생에게 이 세상이란 늘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혼나고 주눅 들어야 하는 곳이었을 겁니다. 나는 그때 무얼 하고 있었을까요? 내 가족이, 내 동생이 그렇게 괴로워하고 있는 동안 나는 무얼 하고 있었을까요? 황망한 마음에 아무리 떠올려보아도 그때 내가 무엇 때문에 바빴는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이리도 기억나지 않는 걸 보니 절대 중요한 일은 아니었나 봅니다.
동생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지 못했고 아르바이트 자리나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동생은 일하고 싶은 마음이 매우 절박했습니다. 자기를 끊임없이 밀어내는 이 세상에 무슨 이유에서든 연결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매우 조급한 마음으로 아르바이트 자리를 여기저기 구했는데 그조차 계속 떨어졌습니다. 나는 일자리란 게 그렇게 쉽게 구해지지 않는 거라며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라며 막연하게 훈계했던 기억이 납니다.
더 이상 무언가에 소속되지 못한 인간이 겪게 될 불안과 고통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 정작 내 동생이 그런 불안을 느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이럴 때 보면 가족이라는 이름은 참으로 나약하고 무심합니다. 그렇게 동생이 여기저기 아르바이트를 찾다가 엉겁결에 동네 빵집에 들어가서 하루 만에 잘리고 돌아왔는데 동생은 집에 있는 온갖 휴지를 다 써가며 방에서 소리 없이 울었습니다.
며칠 후 동생의 표정과 언어가 이상해졌는데 누가 자꾸 자기 욕을 한다고 합니다. 윗 집에서, 옆집에서, 화장실에서. 그때마다 부모님과 나는 무슨 소리를 하냐며 정신 바짝 차리라고 혼을 냈습니다. 며칠이 지나도 동생은 제발 좀 윗집에 가서 자신을 놀리는 사람을 혼내 달라고 울고불고 내게 매달렸는데, 나는 그때 크게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치원 때, 초등학교 때 자신을 놀린 아이, 중학교 때 자신을 놀리고 괴롭혔던 아이들의 이름이 거론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들이 지금도 자신을 쫓아다니며 놀리고 있다고 괴로운 얼굴로 울며 부탁했습니다. 그렇게 동생의 언어는 대상과 시간, 맥락이 뒤죽박죽 섞여 있었습니다.
다음날 병원에 가 진단을 받았는데, 의사는 조현병인 것 같다며 빨리 입원하고 치료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부모님 역시 너무나 혼란스러웠습니다. 병의 내용도 모르고, 내 동생이 왜 정신과에 와야 하는지, 왜 이리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는지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당사자인 동생은 어땠을까요? 입원을 하기로 한 날, 의사 선생님께 들었던 이야기를 동생에게 전했는데 동생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병원 대기실에서 뚝뚝 눈물을 흘렸습니다. 자신한테 일어난 일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또다시 부모가, 세상이 시키는 대로 침묵하고 묵묵히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동생은 폐쇄 병동에 입원한 그날부터 꺼내 달라고 밤마다 울면서 공중전화로 내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자기가 왜 이곳에 있어야 하냐며. 너무 무섭다고 제발 자신을 이곳에서 꺼내 달라고. 저는 그때 다니던 회사의 일들도 엉망이었는데 회사 내 사람들은 서로를 속고 속이며 상처 입히는 일들이 난무했습니다. 함께 동네에서 어울렸던 친구들은 내가 이제는 재미가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고 말했습니다. 내 사정을 알지 못했던 동료들도 친구들도 평소대로 나를 훼손하거나 놀렸습니다.
그 당시 난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억울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위로와 용기를 주기 위해 많은 시간 애를 썼는데, 정작 동생에게는 해줄 수 있는 말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혼란스럽고 불안했지만, 가족들과 수없이 논의하고 말다툼한 후 동생을 병원에서 데리고 나왔습니다.
가족이 먼저 변해야 했습니다. 가족 내 대화 속에 있는 욕과 차별, 혐오가 사라지고 동생을 대하는 태도와 눈빛, 시선이 달라졌습니다. 가족들 저마다 소중히 여기는 삶의 가치와 방식이 동생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바뀌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는 서로에게 받았던 상처와 고통을 잠시나마 덮어두고 동생에게 집중하였고 말로만 가족이었던 사람들 사이에 불편한 협력이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한때 목소리가 작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잘 듣고 그들의 목소리가 더 커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시절이 있었는데, 동생의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는 애당초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조차 없는 엄혹한 세상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그때서야 장애와 정신질환 등 사회에서 끊임없이 소외되고 배제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눈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가족들은 부단히 노력하고 또 노력했습니다. 나도 부모님도, 동생 자신도. 우리는 자료를 찾고 두꺼운 관련 서적을 끊임없이 읽고 공부하였고 우리가 지금 무 엇을 해야 하는지, 어찌해야 하는지를 알기 위해 얄팍하고 잔인한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분투하였습니다.
동생이 약을 먹은 지 5년째가 되는 날, 동생은 더 이상 약을 먹지 않겠다고 내가 언제까지 이 약을 먹어야 하냐고 울며 약 먹길 거부했습니다. 성분을 공부하고 이에 따른 부작용이 얼마나 심각한지 잘 알고 있던 가족들은 더는 동생에게 약을 먹으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약을 끊고 동생은 점점 달라졌습니다. 따스했던 눈빛이 점점 식고 말에서 생기를 잃어갔습니다. 동생은 일주일 가까이 밥을 먹지 못하고 잠도 못 잤습니다. 심성이 착해 누구를 함부로 대할 생각조차 못 했던 동생, 벤치에 앉아 좋아하는 초콜릿우유와 과자를 귀엽게 먹던 늦둥이 어린 동생의 모습은 사라져 갔습니다. 와중에도 틈틈이 동생과 아침저녁 동네 공원을 돌았는데 동생은 여기저기에 작별 인사 같은 걸 했습니다.
거리에 있는 이름 모를 화분에다가, 마을버스에다가, 자주 지나가는 공원의 나무에다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습니다. 친구 하나 없었던 동생은 매일 자신이 보고 만졌던 사물들에 대고 인사를 했습니다. 동생이 ‘왜 이러지’라는 생각과 여차하면 지금과 같은 동생의 모습을 어쩌면 영영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동생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동안 애 많이 썼어. 사랑해” 그러자 동생도 말했습니다.
“오빠도 수고 많았어. 사랑해”
간결하고 상냥했던 마지막 대화가 추운 겨울밤 잠시 오갔습니다. 그날 새벽 집에서 호되게 난리가 나고 아버지가 부른 경찰차 두 대가 아파트 단지 아래에서 오랜 시간 대기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다음 날 동생은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전처럼 잘 웃지도, 상냥하지도, 초콜릿우유와 과자를 찾지도 않고, 더는 어딜 가자 나가자 나를 귀찮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슬며시 와서 안아주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며 혼자 깔깔 웃던 어린 동생은 사라졌습니다. 내가 준비되어 있든 말든 상관없이 내가 알던 동생은 사라졌고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습니다. 그 이후에도 생계와 생활은 속절없이 계속되었는데, 어느 날 세수를 하다가 눈물이 슬쩍 나서 닦다가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습니다.
너무나 미안해서. 어린 시절 함께 해주지 못하고, 혼자서 긴긴 시간을 힘들게 보냈을 어린 여동생이 지난 5년간 나와 잘 놀아주다가 떠나버린 것 같아서. 아! 나는 왜 이리 멍청했을까. 나는 왜 몰랐을까. 어쩌면 많이 못 놀아준 오빠가 보고 싶어 조현병을 핑계로 어린 여동생이 내게 찾아왔던 게 아닐까. 돈도 없어 해준 거라곤 아침저녁으로 호수공원을 돌고, 같이 밥을 먹고, 노래방에 가고, 오락실에 간 게 전부였을 뿐인데.
그 흔한 여행 한번 같이 못 가고, 어디 신나고 좋은데 한번 못 데려가 주고. 와중에 힘들다고 중간중간 모진 소리를 한 적도 많았는데. 나는 왜 그랬을까. 가까이에 있는 나를 멀리서부터 찾아오기 위해 여동생은 얼마나 애를 썼을까. 살면서 온갖 불우한 일과 고통스러운 기억이 찾아왔을 때도 울어 본 적이 없었는데 폭풍처럼 길게 울고 나서 마음을 다잡습니다.
‘지난 5년간 내가 사랑했던, 나를 사랑했던 동생의 모습을 또다시 보고 싶다. 하지만 매일 저녁 내가 떠나보내야 할 동생이, 매일 아침, 내가 새롭게 사랑해야 할 동생이 곁에 있다. 그래. 그래도 곁에 있다’라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서로 죽지 않았으니 이렇게나마 지금 당장은 곁에 있을 수 있다고. 비록 가난하고 별일 없는, 별 볼 일 없는 두 백수 남매가 서로에게 의지해 이렇게나마 작게 살아있다고. 그래 매일 새로운 동생이 찾아오면 나도 매일 새롭게 사랑해야지. 별수 있나. 깊게 숨을 들이마십니다. 눈물을 소매로 열심히 닦습니다. 그리고 세수를 아주 열심히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