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명의 사람도 없는 조용한 산속을 혼자 걷는다는 건 처음에는 아주 낭만적인 일이었다.
등산을 시작한 지 4시간이 넘었지만 한 명의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고, 처음에는 고요함을 즐기며(바람이 내는 귀신소리 제외) 설악산 전체를 전세라도 낸 듯이 은근히 뿌듯함을 느끼며 걸었지만 (올해 설악산 상고대가 이만큼 예쁘게 핀 건 내가 젤먼저 본 게 아닐까? 후후후....(아님)) 시간이 갈수록 가슴 한편에서 공포감이 계속 자라났다.
'날씨 때문에 입산 불가 명령이 떨어졌는데 나만 실수로 입산이 되어 버린 건 아닐까?'
'이러다가 길 잘못 들면 119를 불러야겠지? 내 불찰로 헬기라도 뜨게 되면 정말 엄청 민폐겠지?'
오만 생각을 다 하며 수신불가 지역이 나올까 봐 휴대폰을 자꾸 들여다보며 걸었다.
'뽕짝 크게 틀어놓고 등산하는 민폐 등산객도 오늘은 제가 봐드릴 테니 나타나 주기만 해주세요...'
내 발자국만 남은 계단 길
그러다 어느 순간 '이 길이 아닌 것 같은데?'... 길을 잃었다는 감이 왔다. 등줄기가 싸늘하다.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주위를 360도를 둘러보았는데 아무래도 이상하다.
좀 더 내려가다가 아닌 것 같으면 돌아올까 하다가 내가 이번 등산에서 처음 사용해 본 등산어플 "트랭글"에서 위치를 잡아주는 기능이 있다고 읽었던 기억이 났다.
재빨리 어플을 켜서 나의 주행방향을 살피니, 아니나 다를까... 뜬금없는 길로 하산을 하는 중이셨다 ;;;;
'나 진짜 죽을뻔했네?' (트랭글 어플에 무한한 영광을.... 트랭글 관계자 아님)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서 원래 가야 하는 길을 찾아 다시 방향을 잡았지만 이때 덜컥 겁이 난 이후로 나의 불안감은 더 심해지기 시작했고, 속도는 더 느려졌다.
오늘 내가 생각했던 등산은 이게 아니었는데... 처음 혼자 하는 등산코스를 여기로 잡은 것도, 인기 많은 코스여서 사람들이 많을 거라 생각해서였는데... 호의적이지 않은 날씨에 낯선 등산로에 혼자 있다는 것은 정말 공포스러웠다.
오후 12시가 다 되어서 나는 끝청에 도달했다. 여기까지 오면서도, 이쯤에서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이 꼬리를 물었고, 내가 지금 잘못 결정해서 내 체력을 과신하고 조금 더 가다가 체력이 바닥나면 그땐 정말 헬기를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바짝 긴장이 되어 목이 뻣뻣해져 있었다.
손은 또 어찌나 시린지, 스틱을 겨드랑이에 끼고 양손을 목덜미에 넣어 데우는 이상한 행동을 반복하며 걷고 있었다. (혼자여서 다행이었다..?)
그러나, 끝청에서 나는 드디어 사람을 만났다 ㅠㅠ
기골장대한 남자분이었는데 나보다 뒤에서 나타난 걸로 보아 엄청난 속도로 등산해서 날 앞지르신 것 같았다. 그분은 큰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아이고 오늘 날씨 참 죽여주네요~~" 하시는데 나는 "하아... 다행이다.."라고 인사했던 것 같다... ㅡㅡ;;;;;; (절 이상하다고 생각하셨을지 모를 그분께... 사죄를...)
그분은 다시 쏜살같이 나를 앞질러 나가셔서 곧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그래도 이 산에 나 혼자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만으로도 어찌나 위안이 되던지.
끝청에서의 경치
다시 힘을 내서 정상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에이, 뭐 하산할 때 해가 져버리면 엉금엉금 기어서라도 내려가지 뭐! 힘을 내면 못할 건 아닐 거야! 그 블로그에 등린이(?) 님도 했다잖아! 할 수 있을 거야"
끝청에서 중청까지는 정신적, 신체적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에서의 산행이었고 진짜 내 등산 경력 중 가장 힘들었던 산행이었다.
이 와중에 중청대피소에서의 경치는 죽여줬다.
바다와 하늘이 한번에 보임
10월 말까지만 운영하고 현재 운영 중단되었다는 중청대피소에서는 아무것도 팔고 있지 않았고 앉을 곳도 없었지만 바람과 나 사이에 문이 하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늑한 느낌이었다.
짊어지고 올라온 물도 한 모금 마실 정신없이 여기까지 왔기 때문에 믹스커피 한잔만 얼른 타마시고 나가기로 한다. 바람의 횡포로 그 성능 좋다는 텀블러 안의 물도 그다지 따뜻하지가 않다. 미지근하지만 이 정도면 되었다! 산에서의 커피 한잔은 언제라도 최고의 맛이 아니겠는가!
드디어 대청봉!!!!! 와우!!!!!!!!!! 대청봉이다 하하하하~~~~~
그러나.... 감상에 젖을 정신이 없었다. 난 여기서 내 인생 최고의 바람을 만났다. 거짓말 안 하고 내가 조금 폴짝 뛰기라도 하면 바람에 날려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서있으면 바람이 날 밀어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실제로 넘어짐)
정상에는 사람이 몇 명 정도 있었다. 보니까 한계령 쪽으로 올라온 사람은 거의 없는데 오색코스로 바로 올라온 사람들은 꽤 있는 것 같았다.
그중 인상 깊었던 건 서양인 커플이었는데 여자분은 이 날씨에 레깅스 한 장 입고 스틱도 없이 주머니에 손 넣고 바람을 맞으며 버티고 서있었다. 강하다...
반면 나는 쭈구리처럼 바닥을 기어서 정상석 옆까지 기어가 사진 한 장만 겨우 남기고 얼른 도망치듯 정상에서 내려왔다. (사진 찍어주신 분께 감사...)
쭈구리와 대청봉 정상석
대청봉에서 내려가기 시작한 건 거의 1시 반... 최소 4시간 이내로 내려가야 한다.
아까 어떤 분께 여쭤봤더니 천천히 가도 3시간이면 내려갈 수 있다고 하셨으니까 해지기 전에 하산 가능할 거야! 다시 힘내야지!!!
그렇지만 나는 본디 겁쟁이에 하산길을 더 무서워하는 쫄보로, 남들보다 하산에 확연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 올라갈 땐 쪼르륵 제일 먼저 올라가고 내려올 땐 꼴찌로 내려오기 일쑤였던 나는, 이번에도 엄청난 속도로 내려오며 내가 내려갈 때 올라가는 길에 있던 분이 정상을 갔다가 다시 내려와서 나를 앞지르실 때까지 굼벵이처럼 내려갔다.
이번엔 이유가 있었다! 한계령 코스에서 험한 길을 타며 아무래도 무리가 되었던 듯 오른쪽 무릎과 고관절이 너무 아파왔고, 다리를 딛지도, 들어 올리지도 못할 만큼 통증이 지속되어 거의 질질 끌면서 내려갔기 때문이었다. 이러다가 해가 지면 정말 얼어 죽거나 실족을 할 거라는 공포감이 또다시 나를 지배했고, 진짜 죽을힘을 다해 통증과 싸우며 딱 해가 넘어가는 순간 하산을 완료했다. 정말 드라마틱하다.
오전 6시 40분, 해 뜰 때 시작하여 오후 5시 40분. 해가 딱 넘어가자마자 등산이 끝났다.
장장 11시간의 등산은 결국 마무리되었고, 나는 혼자 대청봉 가기에 성공하였다.
트랭글에 기록된 오늘
어떻게 보면 무모하고 겁도 없는 도전이었다.
지인들은 날 보고 "왜 굳이?" "왜 쉬는 날?" "왜 때문에?" "무슨 부귀영화를?" 등의 널 이해할 수가 없다는 의구심을 표하지만 나는 후회를 하지는 않는다.
물론 그날 오후 3시부터 5시 반까지 통증과 싸우며 허둥지둥 산을 내려오면서 나도 "다신 산에 안가!!"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 무릎의 통증이 좀 가시고 동상 직전까지 갔었던 걸로 의심되는 손의 저림 현상이 사라지고 나면서 또 산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걸 보니, 난 정말 산을 좋아하나 보다. (아니면 지독하게 기억을 미화하는 재주가 있는 것일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