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날개 Jan 07. 2024

계획 대로 되지 않는 행복한(?) 여행 (1)

[여행] 제주 (애월, 올레 7코스, 한라산) 1/2~1/4


  지금은 새벽 4시. 여기는 제주 서귀포 숙소.

한라산 백록담 등반 예약을 해두었기에 아침부터 서둘러 준비 중이다.

"띠링~ 오늘 기상악화로, 삼각봉대피소 이후의 등산로는 통제되었습니다."

일기예보를 보니 어제 미리 확인해 둔 대로 눈송이 1개가 그려져 있다.

'눈발이 좀 흩날리는 정도는 맞으면서 등산하면 돼지모~'

가볍게 생각하고 등반 시작 허용 시각인 6시에 맞추어 관음사 주차장까지 1시간을 운전해서 갔지만...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숙소 근처에선 전혀 그런 기미가 없었는데.. 역시 산의 날씨는 많이 다르다.

이 비를 맞으며 등산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오늘 등산은.. 아쉽지만 취.소.

새벽 3시부터 일어나서 부산을 떨었던 게 아깝고, 등산가방 안에서 시들어가는 김밥도 아쉽게 됐지만..

할 수 없지.





  숙소에 돌아와, 아침 7시부터 김밥을 먹으며 오늘 일정을 재조정하기로 했다.

마침 숙소가 제주 올레 7코스 시작점 근처에 있었고, 등산 대신 올레길이나 한번 걸어볼까?

제주올레 여행자 센터로 Go!

거기서 올레길에 대해 설명해 주시는 아주머니의 열정에 나도 모르게 홀리듯 올레패스를 구매해 버렸고, 앞으로 스탬프를 야무지게 모으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올레 7코스, 17.6km의 길 위에 오르게 되었다.


시이~작!!


  여행을 계획할 때에는 파워 J 성향의 나이지만 막상 여행을 할 때 이런 예상치 못한 변수를 만나 급조하여 스케줄을 다시 조정하고, 조정한 스케줄에서 또 나름의 만족감과 행복을 느끼게 된다면 그 또한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생각보다 심한 날씨의 변덕에 잠 5시간 정도와 산에서의 김밥 도시락의 행복을 버리게 되었지만, 해안길을 따라 조용히 걷는 나만의 시간을 얻었으니 이 또한 행복이다.




  제주 올레길은 언제쯤 한번 걸어보겠다는 생각은 늘 있었지만 막상 덤벼들어 걷기 시작하지는 못하고 있었던 버킷리스트 중 하나이다.

올레길 제7코스를 5시간 정도 따라 걸으며 걸음의 미학(?)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멀리보이는 천지연 폭포와 외돌개


  자동차로 포인트를 찍고 이동하며 다니는 여행은 여러 명소를 짧은 시간 안에 다 볼 수 있고, 몸이 거의 힘들지 않다는 장점이 있다면, 느림보마냥 내 발로 그냥 바닷길, 마을 길과 시골길, 논두렁을 걸으며 하는 여행은 제주 구석구석의 진면모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매력이 있다. (물론 발바닥이 불탈 것 같은 고통을 조금 감내해야 한다.)

  특히 이런 예쁘고 단정한 시골길을 걸을 때는 항상 마음이 포근해진다. (바람만 좀 덜 불었으면... 누가 삼다도 아니랄까 봐 바람이 많다.)



제주 올레패스는 한 코스 당 3개의 스탬프를 찍어야 한다. 시작, 중간, 끝.

누가 만들어낸 루틴인지... 스탬프 찍는 재미가 쏠쏠할 뿐 아니라, 중간 스탬프 지점이 곧 나온다는 생각에 갑자기 힘이 생기기도 해서, 걷는 길을 좀 더 어렵지 않게 해 준다.




  혼자 하는 여행에는 매력이 있다.

이렇게 말해 놓으니, 혼자 여행 엄청 자주 다니는 줄 알겠다.

요즘 겨우 몇 번 해보았을 뿐이지만, 이게 매력이 상당하다!


  카페에서 바다멍 때리다가 책 읽다가 하며 여유롭게  앉아있다가,

옆테이블 부부가 딸 남자친구 이야기를 하다가, 딸이 화장실에서 돌아오자 갑자기 어색하게 대화 주제를 바꾸는 상황을 엿듣게 되어 혼자 실실 웃기도 하고,

  한담 해안 산책길을 주머니에 손 꽂고 슬렁슬렁 걷다가,

나는 더 이상은 한 발자국도 걷기 싫다고 고집부리는 귀여운 대두 비숑프리제를 만나기도 한다.

소도 때려잡을 것 같은 험악한 인상의 비숑의 보호자 아저씨는 '너! 이렇게 고집부리면! 소중히 안아주겠어!!'라는 듯 강아지를 품에 포옥 안고 지나가신다.

  바닷가의 현무암 돌무덤에 앉아있는 큰 새들이 갈매기냐 까마귀냐 둘 다 아니냐 등의 이야기로 서로 아웅다웅하고 있는 어린 커플의 모습을 보며 '싸워라~ 싸워라~' 하는 마음속의 응원을(?) 던지기도 한다.

  지인과 함께 있을 때는 길고양이의 행동을 맘껏 시간을 들여 관찰하기가 어렵다. 고양이 덕후인 나는 길고양이를 아무리 오래 보고 있어도 지겹지가 않은데 보통 정상인들은 길고양이한테 시간을 뺏기는 걸 싫어한다. 그래서 혼자 여행하다 고양이를 만나면 실컷 그 모습을 구경하기도 한다.


한담해안산책로
해안가 돌틈 사이 검은 고양이 뒤통수

 

 혼자 있기에, 완벽타인들의 소리와, 그들의 삶의 단편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누군가와 함께 있거나, 머릿속이 복잡했다면 보이지 않았을 것들이, 마음이 여유로운 혼자만의 시간 속에 자연스레 비집고 들어온다.


집의 기록상점 타르트와 까눌레, 엄청 맛남.


  올레길을 다 걷고 버스를 타고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 길...

발목은 욱신욱신 발바닥은 시큰시큰, 햇볕 가리개 없이 그냥 다니는 통에 햇빛과 바람에 쓸린 얼굴은 화끈화끈.

  걷는 것에는 나름 자신 있는 나이지만, 해변의 돌길과 오르막, 내리막길을 몇 번이나 만나는 통에 생각보다 쉽지 않은 5시간이었다.

숙소에 돌아와 스탬프 3개가 꽝꽝 찍혀있는 올레패스를 뿌듯하게 바라보며 아침에 한라산에 못 가는 바람에 달라진 스케줄에 은근한 만족을 느낀다.



  하지만 한라산이 너무 아쉬웠던 나는, 다음날이라도 한라산 등반 예약 자리가 하나라도 우연히 남으면 예약을 하고 싶어, 계속 예약창을 들락날락하며 남은 자리 없나 호시탐탐 기회를 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드. 디. 어.

관음사 코스 정상등반 예약 자리가 딱 1개가 생기는 게 아닌가! 누군가 취소를 했나 보다.

와아~! 빛의 속도로 예약을 완료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내 발목과 발의 상태가 걱정된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늘 걷지 않고 좀 쉬는 건데....


  그래도 어쩌겠나! 내일은 날씨가 화창하다는데! 내일은 바람도 거의 없고 따뜻할 거라는데!

이런 날씨에 눈 덮인 한라산을 갈 수 있다는데, 안 갈 수 있나!

나는 결국 다음날 또 등산을 하기로 마음먹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다.



-계속-




  

매거진의 이전글 조용히 걷고 느끼는 여행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