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평소 TV를 잘 보지 않는 나와는 참 다른 사람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런 내가 가끔이나마 이렇게 TV를 보게 되는 것도 저 사람 덕이니, 더하고 빼면 내게 참 잘 맞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TV에 넋을 뺏긴 남편이 낄낄 거리며 웃기에 나도 무심히 그쪽을 쳐다봤다.
남편이 종종 보는 덕에 나도 제법 익숙한 예능프로그램에서는 한 출연자가 자신보다 나이많은 출연자의 어깨를 다독이며 잘 좀 하라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소위 보이지 않는 디스 중이었다.
사람들이 저런 프로를 찾는 이유도 바로 저런 맛이겠지만, 쓸데없이 고지식한 나는 가끔 그런 게 조금은 불편해서 나도 모르게 툭 한 마디 던지고 만다.
"에이, 저건 좀 가스라이팅이지."
내 말에 낄낄 거리던 남편이 나를 흘깃 바라본다.
"뭐. 뭐."
"아니, 근데..."
남편이 운을 뗐다.
"가스라이팅이 정확히 뭐야?"
우리 곰. 어쩌나. TV는 지가 보는데, 왜 그런 단어 하나를 모르는 거니. 이정도면 알아듣겠지 싶은 적당한 말을 쭉 나열해본다.
"예를 들면, 그런거야. 다,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네가 부족한 걸 누굴 탓해. 남들도 다 힘들어. 너만 힘든거 아냐. 이런 거?"
"....?"
그래. 못알아들었구나. 남편의 얼굴에 떠오른 의문문에 절로 한숨이 나왔지만, 나는 친절하니까.
이번에는 좀 더 우리가 겪어온 시간들을 예시로 들어본다.
"자기가 회사를 그만두고 싶어. 그런 자기한테 내가 그러는거야. 네 주제에 지금 다니는 회사보다 좋은 회사 다닌 수 있겠어? 어디가서 그런 월급을 받겠어? 자기만 힘든 거 아니잖아. 나도 힘들어. 그렇다고 내가 아이를 안기를 순 없잖아?"
실제로 몇 년전 회사를 그만두고 한달만 여행을 다니고 싶다는 남편에게 그렇게 하라며, 차라리 아이가 어린 지금 빨리 그만두고 하고싶은 걸 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지 생각해보라고 했지만 그 속내는 미친..싶긴 했으니까.
그런데 내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남편이 그제야 이해가 된다는 얼굴로 한마디 한다.
"...조언?"
그 단어를 듣자,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내 남편은 한국사회의 전형적인 한국인이다.
약간 제 실속을 챙기고 싶어하는 걸 너무 드러내서 오히려 실속을 못챙기는 덕에 '쟤 진짜 밖에서도 저러면 어쩌지?' 싶은 사람이다.
자신이 떠드는 것의 반의 반도 요령을 못피워 손해보기 일수인 전형적인 한국남자.
그런 남편이 진지한 얼굴로 대답한다.
자신을 폄하하고, 내까리는 말을 조언이라고.
그렇구나. 그런 말이 바로 우리 사회의 조언이구나. 내가, 그리고 네가 친절을 가장하고, 상대를 걱정하는 마음에 띄우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오히려 그 사람의 목을 조르는 줄이기도 했다.
선의의 마음을, 선의의 말로 표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우리는 그 당연한 일조차 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이그"
휘몰아치는 마음을 숨긴 채, 나는 남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위로가 필요한 순간, 적어도 나만은 네게 조언이 아닌 위로를 전하길.
그런 마음을 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