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이 엄마의 성장 기록

아이보다 느리게 엄마도 성장 중

by 날랩

아가는 매일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란다.

매일이 새롭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이따 다이어리에 꼭 적어둬야지’ 하고 눈으론 아가를 보면서 머릿속으로 안 잊으려고 몇 번을 되뇐다.


아기의 성장 증거는 돌아서면 잊을까 두려울 만큼 많다.


그렇다면 나는?


엄마로서 나도 아기와 같은 날 태어나서 함께 이 세상에 적응 중인데, 아가만큼 성장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아가의 나이에 맞추어 (0세) 퇴행하고 있는 것 같다.


한순간에 모자란 0인분 인간이 되어서 한 생명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의 무게가 나를 짓눌렀다.


함께인 남편도, 도움을 주는 친정엄마도 결국엔 보조자였다.


아이가 언제 밥을 먹을지, 얼마나 먹을지 결정하는 것도, 깨어있을 때 무엇을 하게 할지 결정하는 것도 나다.


없는 시간을 쪼개어 책을 뒤져보고, 유튜브를 돌려봐도 결국 그들이 알려주는 정보 속에서 ‘결정’을 해야 하는 것은 나다.


문제는 미숙한 내가 한 결정의 책임이 소중한 아가한테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 사실이 나를 미치게 했다.


내가 ‘어디선가 보고’ 늘리기로 한 수유량으로 아기가 크게 게운다거나, 게우는 것이 두려워 이번에는 또 줄인 수유량으로 아가가 자지러지게 울거나 하는 식이다.


아가는 내가 공부하고 실천하는 대로 투명하게 드러나는 ‘성적표’와 같아서 내 결정에 따라 휙휙 영향을 받고, 대개는 괴로워했다.


‘엄마가 미안해’ ‘엄마가 부족해서 미안해’


왜들 그렇게 아가한테 사과들을 하나 했는데 다들 그래서가 아닐까. 내 결정으로 아가가 힘들어하는 걸 매일 바라봐야 하니까.


선택의 대가가 이토록 확연하고 무거울 줄이야.


이러다가는 내가 진짜 내 자신을 미워하다 못해 부정할 것 같은 위기가 몰려왔다.


내가 생각해도 내 정신 상태가 온전하지 못했다. 툭 건드리면 눈물이 터져 나왔고, 무엇엔가 쫓기듯이 늘 불안했다.


[해낸 목록]


그래서 나는 아가의 성장 기록 옆에 함께 써두기 시작했다.


1. 세탁 (어른 것)


2. 독서(똑게 육아, 육아 일기)


3. 실비 신청


4. 아기 케어(세척기, 기저귀, 재우기, 놀기, 목욕)


5. 일기


6. 병원 문의


내가 한 것은 작은 것이라도 다 썼다.


1. 오줌 공격에 당황하지 않고 빨래 돌리기


2. 벌레 출몰! 딸을 위해 어설프지만 퇴치! 처리!


3. 당근에서 유아용품 네고 성공


한 일을 나열하는 것 같던 것이 점점 나를 응원하는 듯한 목록으로 바뀌어갔다.


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하니 용기도 생기고 더 목록을 늘리고 싶어졌다. 이왕이면 더 멋진 것들로.


그날로 ‘육아하면서는 힘들겠지’라고 했던 것들을 채워 넣었다.


오키로북스에서 하는 워크숍을 신청하고, 스트레칭하기 시작하고, 저녁을 마무리하면서는 sns에 숫자일기도 드문드문 쓰기 시작했다.


드라마틱하게 육아가 수월해졌다거나 내가 성장한 기분이 들지는 않았지만 이런 기록과 실행을 통해 변화된 것은 아이를 대하는 마음이었다.


그전에는 온 신경이 ‘육아’ ‘어설픈 나’에게만 맞추어져서 곤두서있었다면, 기록한 뒤부터는 아기에게 고마운 맘이 더 커졌다.


혼자 노는 걸 멍-하니 보지 않고 옆에 같이 누워 스트레칭했고, 낮잠을 곤히 자는 옆에서 워크숍 과제를 했다.


“평화롭고 조용한 시간을 줘서 정말 고마워 우리 딸, 덕분에 엄마도 자라고 있어.”


라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었다.


아이 듣기 좋으라고, 혹은 엄마가 되었으니 어쩔 수 없이 숙제처럼 하는 ‘고마워’ ‘사랑해’가 아니라 진심으로 우러나온 말이었다.


아가처럼 쑥쑥 자라진 않아도 나도 거북이처럼 조금씩, 매일을 엄마로 자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