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 : 아버지의 해방일지
글 : 정지아
출판사 : 창비
출판 연도 : 2022.09.02
별점 : ★★★
난이도 : 보통
내 맘대로 한 줄 발제 : 나는 어떤 딸인지, 어떤 딸이어야 하는지,
집에서 책 읽기를 하려니 자꾸 늘어진다. 핸드폰에 자꾸 손이 가고 나의 의지력은 야주 약한 탓에 오늘은 큰맘 먹고 카페에 갔다. 남의 시선을 어느 정도 강제로 의식하고 나서야 딴짓하지 않고 집중해서 읽어 내려갈 수가 있었는데. 책을 잘 못 선택했나 보다. 시끌벅적한 카페에서 구석에 혼자 앉아 청승맞게 책을 읽으며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고 훌쩍거리는 아줌마라니.
22년도에 출간되어 한동안 베스트셀러에 있던 책이었다. 그 책이 나오기 얼마 전에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가 인기를 끌어 그런 비슷한 제목으로 책이 나온 건가 싶었다. 물론 그 드라마도 이 책도 당장 봐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보리라는 생각만 하고 뒤로 한껏 미뤄두었다. 그렇게 미뤄둔 책과 드라마와 영화는 또 얼마나 많은지.
예전에는 책을 주로 사서 봤다면 요즘에는 거의 빌려 보고 있는 편이다. 우리 동네 가장 가까운 도서관은 작은 도서관이어서 장서 규모가 매우 작다. 그래서 시간이 허락한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대여 가능한 서가를 쭉 훑어내려보는 편이다. 총 6면 정도, 한 면에 4~5개 서가가 있고 정말 장서가 별로 없다. 진짜 보고 싶은 책이 있을 때는 상호대차를 해서 빌려보지만 보통을 이렇게 책을 찾는 걸 더 선호한다. 그리고 그렇게 샅샅이 훑어보다 이 책을 발견했다. 낯익은, 한때 베스트셀러였던, 평가도 나름 나쁘지 않았던 그 책. 안 읽을 이유가 없잖아.
빌리는 데는 돈이 들지 않아 가벼운 마음으로 여러 권 빌려온다. 그런데 이상하게 집에 책을 쌓아놔도 쉽게 책장을 넘기진 않는다. 책장을 넘기고자 손가락을 움직이는 데까지는 또 얼마나 많은 유혹이 있는지. 근데 있잖아. 막상 자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하니 눈물이 나지 않는 구석이 없어. 홍보 문구를 보면 웃다가 울다가 한다는데. 나는 거의 두 시간을 카페 구석에서 눈물만 훌쩍거리다가 나왔다.
내가 잘 모르는 아버지. 하지만 아버지의 딸이어서 평생을 엮여있던 연좌제. 그래서 외면하고 싶었던, 별거 아니라고 치부하고 싶었던 아버지의 삶. 그렇지만 그렇지 않았던 아버지. 그저 평범하게 살수 없었던 시대. 가족과 친구가 서로 총을 겨누고 죽고, 죽이던. 자의가 아닌 타의로 결정됐던 삶. 그 삶에 내 책임은 얼마나 있고, 그 결과를 시대는 얼마나 책임을 져줄 수 있는가. 남 탓하지 말라고 해야 할까. 어쩔 수 없는 삶의 흔적들일까. 평생의 원칙을 마지막까지 고수할 수 있는 삶이란 아름다운 걸까. 아니면 신념이 필요치 않는 걸까. 그러지 못했다고 비난할 수 있나. 나는 어떤 딸인가.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선택이 가능했던 아버지를 원망했나. 아버지도 선택했던 걸까. 선택 당한 걸까.
읽어 내려가는 거의 대부분의 순간마다 훌쩍거렸지만. 가장 나를 때렸던 건, 역시 나는 어떤 딸인가. 내가 못난 딸이어서 더 그런 걸 수도 있다. 나 역시도 어떤 딸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진 않았던 것 같다. 아니 어떤 딸인지는 잘 알고 있다. 정 없고 무뚝뚝한 붙임성 없는 딸. 그래서 내가 어떤 딸이 되었어야 했나.
가장 애틋할 것 만 같은 부모와 자식은, 이상하게도 일방적이어서. 자식 입장에서는 받는 게 당연하고 주는 데에는 엄청 생색을 내게 되는 것 같다. 항상 투덜대고 하지 말라고 하고. 뒤돌아서면 후회하고. 또 막상 만나면 틱틱 거리고. 그래도 나를 사랑해 줄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 그런 걸까. 못났다. 못났어.
분명 후회할게 뻔하다. 나는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쉬이 나아지질 않는다. 겁이 나고 무서워서 자꾸 숨고만 싶어진다. 엄마 아빠는 원래부터 그렇게 든든하고 단단했잖아. 항상 기댈 수 있을 것만 같아. 기대지 못하는 순간을 생각해 본 적이 없어. 그러다 탓할 사람이 없는 세상이 온다면. 그때는 또 얼마나 하염없이 사무칠까.
41. 일흔 가까운 나이에 처음으로 마주친 형 없는 세상, 탓할 사람 없는 세상이 두려워서.
42. 그러나 사람이란 누군가의 알 수 없는 사정을 들여다보려 애쓰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아버지는 그러게 모르쇠로 딴 데만 보고 있으면 안 되는 것 아닌가, 뭐 그런 생각도 드는 것이었다.
49. 총구를 하늘로 겨눠도 재수 없으면 떨어지는 내 총알에 누군가 죽을지 모르는 일 아닌가. 그 누구도 내 총에 죽는 일만 없기를 날마다 기도한다네. 부디 살아서 돌아오시게. 살아서, 꼭 살아서, 다시 만나세.
54. 아버지는 난생처음, 자식에게 돈을 요구했다. 고작 삼만 원을. 자식이든 남이든 절대 신세 지지 않는다는 평생의 원칙을 깨뜨리게 만든 것이 고작 삼만 원, 이것이 늙은 혁명가의 비루한 현실인 것이다.
62. 하염없이,라는 말을 나는 처음으로 이해할 듯했다.
67. 혁명가와 인내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인내할 줄 아는 자는 혁명가가 되지 않는다는 게 고등학생 무렵의 내 결론이었다.
110. 그러니 아버지는 갔어도 어떤 순간의 아버지는 누군가의 시간 속에 각인되어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생생하게 살아날 것이다. 나의 시간 속에 존재할 숱한 순간의 아버지가 문득 그리워졌다.
224. 어떤 딸인지, 어떤 딸이어야 하는지, 생각해 보지 않았다. 누구의 딸인지가 중요했을 뿐이다.
231. 사무치게,라는 표현은 내게는 과하다. 감옥에 갇힌 아버지야말로 긴긴밤마다 그런 시간들이 사무치게 그리웠으리라. 그 당연한 사실을 나는,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야 겨우 깨닫는 못난 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