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시금치로제파스타
살아온 수십 번의 여름을 모두 지워버릴 만큼 막강한 오늘이었다.
더위에 녹아 뇌가 흐물흐물해진 것 같다. 밖에 나갔다 오면 한 동안 뜨거운 김이 빠지지 않아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아, 이러면 도저히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아!!"
나는 그렇게 맹렬하게 몰아붙이는 2018년의 여름에 패배를 인정하고야 말았다.
여름이란 녀석에 딱히 불만이나 원한을 가지고 있는 편은 아니었다. 좋아한다고 말하는 편도 아니었지만.
더위를 많이 타지 않아서 그동안 에어컨이 없는 집에도 잘 살았었다. 오히려 여름이 되면 선명해지는 풍경과 말짱해지는 내 정신을 좋아했다. 더위가 가신 여름밤의 공기를 좋아했다. 바삐 지내는 다른 계절들보다 조금은 쉬어가도 될 것 같은 여유에 사람들을 자주 찾기도 했다. 시원하게 넘기는 맥주가 우주최강 꿀맛이 되는 마법의 시즌이기도 했다. 유일하게 두 번 정주행 한 드라마도 여름의 도시와 공기가 담겨 있는 <프로듀사>였다. 종종 내리는 비도 좋아했다. 후드득 떨어지는 빗소리는 그 무엇보다 더 시원하고, 포근했다. 비를 맞기 위해 우산을 쓰지 않았던 교복 입은 나도 생각이 난다. 외갓집 친척들과 해마다 계곡에 놀러 갔다. 몇 번은 강원도에 농활을 갔다. 오전에 들어갈 땐 자그마했던 호박이 오후에 나올 때는 쑥쑥 커 있는 것을 보았다. 호박잎을 잘라내던 반복된 가위질은 낮잠시간 꿈속에서도 계속되었다. 교회 친구들과 커다란 회관에서 따닥따닥 붙어 잠을 잤다. 트럭 뒤에 실려 다음 밭으로 이동할 때면 시원한 바람이 볼에 와 부딪혔다. 땀도 무지하게 흘렸을 텐데 정자에 모여 수박을 먹던 순간, 비 온 뒤에 무지개를 봤던 순간, 정자에 누워 있던 순간만 선명하다. 교회 수련회에서 나는 몇 번이나 인생의 허물을 벗겨낸 순간들을 만나기도 했다. 좋은 사람들과 순간의 자국은 여름과 함께 짙게 남겨져 있다.
이번 여름도 그와 같을 줄 알았다.
여름에만 가능한 여름짓을 할 상상에 부풀어 있었다.
회사 일도 잠시 쉬어 가는 타이밍에 저녁마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팽팽 놀 수 있을 거야. 어스름해지는 저녁에 용산구가 아닌 어딘가에서 너를 만나 시원한 맥주를 마실 거야. 비가 오는 소리를 들으며 뒹굴거리던지. 아니면 시원한 카페에서 미뤄뒀던 책 몇 권을 완독 하던지. 푸른 잎사귀 가득한 나무들이 많은 어떤 길을 오래도록 걷던지. 돗자리를 가지고 한강에 가서 누워있던지.
하지만 이 모든 게 땅으로도 내려오지 못한 하늘의 별따기가 되었다.
나의 미션은 오로지 이 불구덩이에서 무사히 살아남는 것일 뿐. 지금은 집에 와서 몇 시간씩 누워 체력을 보충하기에도 부족하다.
근데도 난 여름이 좋은가 보다.
변태 같지만 너무 더워서 뇌가 흐물흐물해졌는데, 그러니까 더 뭔가 좋아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를 때가 있다. 그래, 난 올 해를 계기로 여름을 좋아하는 사람 클럽에 가입하겠다.
뭘 해야 직성이 풀리는 내가 아무것도 안 할 수 있는 명분이 있어서 좋다. 회사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데 그러니까 할 수 있는 딴짓이 마구 생각나서 좋다. 이렇게 시간을 허비할 수 있어서 좋다. 너무 정신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슬로모션을 건 것 같아 좋다. 2018년을 딱 반으로 접어 상반기와 하반기의 나를 구분 짓는 느낌이다.
그래도 빨리 기온이 떨어져서 원래 내가 좋아했던 여름짓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카카오미니가 들려주는 빗소리, 계곡소리, 매미소리 ASMR로는 부족하다.
퇴근 후에 유쾌한 사람들이랑 시원한 맥주라도 마시러 갔으면 좋겠다.
여름아, 정신 차리고 돌아와. 플리즈.
2018년 8월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