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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흔적들

대청소를 하면 생기는 일

by 날찌

4년 전 이사온 12평 남짓한 지금의 집에는 정말 코딱지만한 베란다를 제외하고 창고로 쓸만한 공간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점점 늘어나는 짐을 감당하려면 한 번씩 집을 다 뒤집어 엎어야 한다. 말 그대로 수납공간을 싹 비워내고 그 안에 있는 짐들을 모두 한 곳에 모았다가 버릴 건 버리고 남은 짐들은 재분류하여 다시 수납장에 차곡차곡 넣는다는 건데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은 이 과정을 겪는다.


이렇게 정리를 하다 보면 가끔 추억돋는 물건을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추억팔이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올해도 그런 물건이 하나 나왔다. 2년 전 한 달 간 무급휴가를 내고 다녀온 발리에서 끄적였던 일기장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코로나가 터질 줄도 이렇게 오래 갈지도 몰랐었는데 새삼 마스크 없이 자유롭게 길거리를 돌아다닐 수 있었던 그 시간이 갑자기 그리워졌다.


다른 때 같으면 이렇게 여러 여행지에서 바리바리 싸들고 왔던 각종 템플릿, 기념품 등을 꺼냈다가 스윽 훑어보고는 나중에 정리해야지 하고 다시 넣어두곤 했을텐데 유독 올해는 가슴 한 켠에서 몽글몽글한 감정이 올라온다. 마음만 먹으면 쉽게 떠날 수 있었던 여행이었는데 이제는 해외는 물론이고 국내여행 조차도 조심스러운 시국이다보니 순간 지금이 그동안 다녀온 여행의 흔적들을 하나씩 꺼내어보며 정리하기 적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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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추억하기 어려운 상태로 보관중인 짐들


자연스럽게 여행 관련 짐들을 서랍에 넣지않고 하나씩 꺼내어 놓았는데 양이 꽤 됐다. 각종 팜플렛/엽서들도 나오고 나중에 필요할지도 모른다며 꼬깃꼬깃 가져왔던 영수증은 잉크가 다 날라가서 흰 종이만 남아있기도 했다. (그때그때 정리를 안하니까 이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지네...) 기념품으로 쟁여온 소품들도 서로 뒤엉켜 쌓여있는 걸 보고 있자니 피식 웃음도 났다. 여행 막바지가 되면 기념품 샵이란 샵은 다 들러서 세상 심각하게 디자인과 가격을 비교해가며 고르고 또 고르고 혹여나 망가질까 몇겹씩 사서 캐리어에 넣어 가지고 왔었는데 이렇게 나뒹구는 모습이라니 거참 머쓱.


더 이상 이대로 방치할 순 없다. 일전에 흥미롭게 읽었던 숭 작가님의 ⟪인스타하러 도쿄 온 건 아닙니다만⟫, ⟪여행의 물건들⟫ 책을 보면서 느꼈던 것처럼 너무 거창할 필요도 없고 케케묵은 여행 기억을 봉인해제하고 추억한다는 것에 의의를 두면서 기록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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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 님의 취향이 가득한 물건들과는, 조금 결이 다르겠지만...


시간이 많이 지나 잘 기억나지 않는 건 기억이 안나는대로, 기억이 넘쳐날 때는 또 TMI 가득하게,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Photo by Dariusz Sankowski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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