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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찌 Jul 22. 2021

퇴사 말고, 한 달만 휴직

삼십육계 줄행랑도 전략이다

2019년 여름. 나는 많이 힘들었다.


그해 1월, 
9개월 동안 준비한 신규 서비스를 드디어 오픈했다. 기분이 날아갈 듯 했다. 내 수준에서 해내기 어렵다고 생각한 난이도의 업무였고, 개인적인 업무 역량이 한 단계 뛰어 올랐다고 생각하니 뭔가 대단한 걸 해낸듯한 느낌이 들었으니까. 

문제는 그 이후였다. 힘들게 오픈한 서비스는 해외 숙소 예약 서비스였는데, 예상치 못한 사회적 변수들이 발생했다. 일본 불매 운동이 번지고, 홍콩 시위가 터지면서 서비스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 시작한 것이다. 회사에서는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할 수 밖에 없다보니 매출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일본, 홍콩 지역을 대상으로 한 적극적인 마케팅 활동도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자연스레 내가 오픈한 서비스는 매달 KPI를 달성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손놓고 있을수는 없으니 서비스를 살려볼 개선 과제를 계속해서 만들어냈지만, 매번 우선순위에서 밀려 개발 리소스를 배정받지 못했고 결국엔 손발이 묶인 채로 떨어지는 지표만 바라볼 뿐이었다. 

일이 바빠서 힘들었을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냥 한없이 무기력했다.


삼십육계 줄행랑도 전략이다.

외부요인으로 인한 부진이라 아무도 나에게 뭐라할 사람은 없었고, 다른 서비스로 업무 재배치를 요청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한 번 생긴 무기력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중국의 고대 병법서 『삼십육계』의 마지막 부분은 「패전계」로 적의 힘이 강하고 나의 힘은 약할 때의 방책이 담겨 있다. 서른여섯 개 계책 중에 서른여섯번째, 즉 마지막 계책은 ‘주위상走爲上’으로, 불리할 때는 달아나 후일을 도모하라는 것이다. 
- 김영하의 ‘여행의 기술’ 중 -


잠시 퇴사도 생각했지만 신랑이 6년간 다닌 회사를 퇴사하고 커리어 전환을 위해 새로운 분야의 공부를 하고 있어, 내가 유일하게 생활비를 벌어오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결국엔 휴직을 선택했다.

휴직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육아/병가와 같은 사유가 아니라 단순 번아웃 때문에 휴직을 요청한 직원이 지금까지 없었기 때문에 회사에서도 난감하기는 매한가지였을 거다. 3주 정도의 협의를 거쳤고, 결국 무급휴직으로 가닥이 잡혔다. (지금 생각해보니 무슨 똥배짱이었는지...)

막상 무급휴가가 결정되고 나니 당장의 주머니 상황은 물론이거니와 커리어 측면에서 포기할 수 밖에 없는 부분도 있을건데, 여러가지 현실적인 부분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달 생활비, 매달 갚아나가는 대출금을 어쩔 것이며, 혹여나 연말평가에서 받을 수도 있는 불이익까지도. 당장은 ‘득’보다 ‘실’이 더 많아 보였다. 


그런데 이게 또 하나씩 뜯어보면 그리 심각할 일은 아니었다. 일단 틈틈히 쟁여둔 비상자금으로 한달 생활비와 대출금은 해결할 수 있었고,
 휴직 생활을 마무리하고 월급이 나오기까지 조금 쪼들리긴 하겠지만 조금 덜 쓰면 그렇게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평가도 애초에 상반기 성과가 없어 좋은 결과는 기대도 할 수 없으니 내년 연봉은 욕심가지지 말자 생각하니 신기하게도 금방 마음이 편해졌다. (욕심을 버리면 맘이 편하다는 게 이런건가)

그래, 인생 일년만 살고 말 거 아니잖아? 이것보다 더 큰 걸 잃어버리기 전에 잠시 멈추기로 결심했다.
 


삼십육계 줄행랑도 전략이라고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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