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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다짓기 최주선 Jun 02. 2023

1980 대중목욕탕 바나나우유

반신욕 하다 떠오른 어린 시절. 




오전에 산을 걷고 집으로 서둘러 왔다. 배도 고팠다. 씻고 싶었다. 모처럼 반신욕을 할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날이 쌀쌀하다. 이런 날에는 뜨끈한 물에 몸을 지지는 게 최고다. 주 몇 회는 반신욕을 하고 싶은데, 잘 안된다. 남아공에 와서 욕조 있는 집에 사는 것도 복이다. 욕조가 없으면 생각도 못할 테니. 

그런데도 망설여지는 이유가 있다. 수도세 내야 하고, 물이 전기로 데워지다 보니 전기세 생각도 하게 된다. 가끔은 뜨끈한 물속에 몸을 담그고 온몸이 이완하는 시간이 간절한데도 참는다. 그거 몇 푼이나 한다고 하겠지만, 기저(전기로 물을 데워주는 시스템)가 작아 반신욕 한 번 하고 나면 샤워까지 하고 나면, 다음 사람은 찬물로 샤워해야 한다. 물을 다 소진하고 그다음 물이 데워 질까지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보통 아무도 씻지 않아도 되는 타이밍에 하는 때가 종종 있다. 오늘도 몇 개월만인 듯하다. 


무튼 오늘은 소원성취다. 뜨끈하긴 한데 겨울이라 윗 공기가 차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탕에서 점점 냉기가 느껴진다. 그래도 물속에 누워있으니, 한량이 따로 없다.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웠는데 감자기 입에서 바나나 우유맛이 난다. 맞다. 어렸을 때는 엄마랑 매주 대중목욕탕을 갔다. 성인이 되어서도 엄마랑 갔다. 결혼 후에는 친정에 가서 하룻밤 잘 때마다 갔다. 이제 엄마랑 둘이 아니고 별이까지 셋이었다. 


고등학교 친구 중에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대중목욕탕에 가본 경험이 없다는 친구가 있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꼭 갔는데 한 번도 이용하지 않았다는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짜야? 진짜로? 너네 엄마는 안 가?

놀라서 이렇게 물었던 거 같다. 나뿐 아니라 옆에 있던 친구도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사실이었다. 친구 엄마는 발가벗은 몸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걸 싫어하고, 대중목욕탕 물도 더러워서 안 간다고 했다. 덕분에 친구도 가보질 못했던 거다. 

그때 난 생각했다. 


그럼 너는 목욕하고 나와서 먹는
그 개운한 바나나 우유맛을 모르겠구나!
그게 얼마나 맛있는데......

경험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맛. 그냥 바나나 우유맛이 아니다. 

훈증이 가득한 뜨거운 탕에서 목욕하고 나와 체중계에 올라가 몸무게를 잰다. 로션을 톡톡 바르고, 빗질하고 선풍기 바람으로 머리를 말린다. 옷을 갈아입고 목욕탕 아줌마가 있는 냉장고로 간다. 문을 열면 노래가 나오는 냉장고 노랫소리 빨리 꺼지라고 얼른 닫는다. 생각난다. 막 꺼낸 바나나 우유에 빨대를 톡하니 꼽아 쪽 하고 들이키는 그 노란 맛 말이다. 계산은 엄마 몫이다. 그냥 평소에 먹으면 그 맛이 안 난다. 꼭 목욕탕에서 순서대로 하고 나와서 먹어야 그 맛이 난다.   




세상에는 나와 같은 경험을 하는 사람이 있다.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도 있다. 반대로 나와 같은 경험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사람 역시 있다. 같은 경험을 하지 않으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일의 경중을 피부로 느끼기 어렵다. 공감이 안되기 때문이다. 


출산 경험이 있는 여자들은 출산 이야기가 나오면 임신부터 시작해 출산 과정까지 이야기하느라 날밤을 샐 수도 있다. 나는 세 번 출산했으니까 거짓말 조금 보태서 3일 밤도 새울 수 있다.  군대 다녀온 남자가 군대 이야기를 하고, 축구 좋아하는 사람이 축구 이야기 하고, 둘 다 경험이 있는 사람은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를 한다. 여자뿐 아니라 남자들도 공감이 되는 주제라면 밤을 새워서도 이야기할 수 있을 거다. 실제로 나는 남자들이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하는 장면을 봤다. 과묵한 남자가 그렇게 수다스러워질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경험이 있는 사람은 자기 경험을 눈에 그리듯 세세하게 말할 수 있다. 렇게 마치 지금 그 장면을 보는 것처럼 설명하면 된다. 그게 말로 하면 이야기고, 문자로 쓰면 그게 바로 글쓰기다. 내게 있던 경험을 글로 눈으로 보이듯 상세히 묘사하는 것, 그게 글쓰기다. 




반신욕을 하며 수증기에 뭉게뭉게 떠오른 추억은 물에서 일어나자 금세 사라졌다. 추워서 호들갑 떨었던 탓이다. 이내 뜨끈한 국물이 먹고 싶어졌다. 끓여 놓은 국도 없고 시커먼 커피를 타 마셨다. 그리고 또 무엇을 쓸까 생각했다. 이렇게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하나씩 글쓰기와 엮어 쓰면 된다. 삶과 연결하고 글쓰기와 연결하고, 사람과 연결한다. 


글쓰기는 나와 과거의 연결이다. 

결국은 글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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