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면 안돼.
하나님이 내 아이를 일찍 데려가시면 어쩌지?
아이들이 아플 때마다 종종 드는 생각이다. 이따금씩 고열에 시달리며 눈물을 찔끔거리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대신 아파줄 수 없는 게 너무 안타깝다. 막내의 40도 고열은 꼬박 이틀 밤낮으로 괴로웠다. 물 한 모금 삼키는 것도 손사래 치며 "내일 먹을게."라 말하는 여섯 살 꼬맹이의 말을 듣고 있자니 웃음이 났다가 눈물이 났다가를 반복했다. 아홉 살 형이랑 둘이 자는 침대에 엄마를 끌어당겼다. 집안에 누군가 환자가 발생하면 그날 밤 간호는 엄마 몫이다. 아이들도 "오늘은 엄마랑 자야겠네." 말하며 자기들끼리 짝꿍을 정한다.
역시, 이날도 셋째와 엄마는 짝꿍이 되었다.
삐. 삐.
새벽 내내 아이의 열이 떨어졌는지 여전한지 다시 올랐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밤 잠을 설쳤다. 고열에 시달릴 땐 해열제를 먹어야 하고, 배가 아파 설사를 하거나 구토할 경우를 대비해 화장실 문도 열어 놓는다. 다행히 고열 이외의 다른 증상은 없이 이틀 밤을 지새웠지만, 그놈의 고열이 사람 잡겠다 싶었다. 티브이를 좋아하는 아이는 티브이를 보려고 하지도 장난감을 가지고 놀지도 않았다. 그 좋아하던 젤리와 사탕, 과자도 쳐다도 안 봤다. 그저 잠시 나왔다가도 다시 방으로 기어들어가 춥다며 이불을 끌어당겼다. 이틀 그리고 삼일째 되는 날에도 여전히 미열은 남아있었고, 그 삼일 동안 나는 마스크 착용도 안 한 채 아이와 딱 붙어 있었다. 남편은 마스크라도 쓰라며 만약에 코로나면 어쩌려고 그러냐고 말했지만, 정작 본인도 안 쓰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린아이들과 비좁은 집에서 격리를 한다는 건 하늘의 별따기만큼 이 힘든 일이다. 옆집 아이는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코로나 양성 판정을 받고 방에 텐트를 쳐주고 그곳으로 엄마가 마스크, 장갑을 끼고 밥을 날라다 줬다는데,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조차 없다고 판단했다.
띠리리리 웅웅웅
전화벨과 진동이 같이 울렸다. 영어로 적힌 학교 이름이었다. 으앗, 학교 전화다.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하다.
"엘이가 배가 아프고 속이 안 좋다고 하네요. 와서 데려가세요."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순간 올게 왔다 싶었다. 남편이 가서 얼른 엘이를 데리고 왔다. 집에 와서 조금 쉬게 뒀는데 머지않아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39.5도. 40도 육박이다. 해열제를 먹이고 쉬게 두자 열이 내려갔는지 언제 아팠냐는 듯 살아났다. 거실에 나와 티브이를 보면서 제법 편안해 보이는 모습을 보니 안도가 됐다.
띠리 리리 웅웅웅
또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또 학교 번호다. 슬픈 예감이 들었다.
"별이가 몸이 매우 안 좋아 보여요. 머리가 아프다고 해요. 와서 데려가야 할 것 같습니다."
코로나 이후로 조금만 컨디션이 좋지 않아도 집으로 돌려보내는 경우가 허다한데 우리 아이들은 그런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셋째를 시작으로 무슨 줄줄이 비엔나도 아니고 별이까지 데려가라는 전화를 받으니 올게 온 게 확실하다 싶었다.
머리 아프다던 별이는 집에 와서 침대에 드러누웠다. 학교에서 세 차례 선생님께 머리가 아프다고 이야기했고, 삼세번 참으셨던 건지 선생님은 세 번 째에서야 전화를 했다. 이 날 오후부터 고열이 파도를 치기 시작했다. 하나 약 먹여서 내려가면 그다음 , 또 그다음. 아이들 케어에 집안은 난장판이 됐다.
다행히 셋째는 그날 저녁부터는 열도 없고, 기침도 하지 않았다. 삼일 내 고열과 싸워 이겨낸 꼬맹이가 그렇게 기특할 수가 없었다. 밤새 뒤척임 하나 없이 고요하게 잠든 모습을 보면서 행복감마저 들었다. 행복이 별거인가 내 사랑하는 가족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그저 평범한 매일을 보내는 게 행복이 아닌가 깊은 감사가 나오는 순간이었다. 다음 날에도 별이와 엘이의 기침과 가래, 코막힘 그리고 고열은 계속되었다. 아무래도 이건 코로나가 맞는 것 같았다. 만성비염이 있는 엘이는 감기가 오면 코 막힘으로 오고, 어렸을 적 마이코플라즈마 폐렴을 심하게 앓았던 별이는 그 뒤로 감기가 오면 가래로 온다. 늘 인지하고 있음에도 코로나가 걸리면 가래가 심해진다는 말을 듣고는 심장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코로나 검사를 해봐야 될 것 같아."
남편에게 코로나 검사할 장소를 알아보라고 했다. 무료로 검사가 되지 않는 남아공에서는 병원에서는 800 란드를 내고 검사를 받아야 한다. 다행히도 최근에는 근처 약국에서 300 란드에 검사를 받고 10분 이내로 결과를 받을 수 있다는 정보도 얻었다.
달달 떨면서 아이들을 데리고 약국으로 향했다. 속으로 빌었다. 제발 아니길. 한편으론 맞아도 어쩌겠냐만은 잘 이겨내길.
결과는 negative. 음성이다.
순간 한 줄인 키트를 확인하고도 정신 못 차리는 나를 붙잡고 남편은 "임신 아니래." 라며 장난을 쳤다. 어디서는 코로나 키트에 두 줄이 나오면 '축하합니다. 임신입니다."라고 말한다고 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밖으로 나오는데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일단 학교에 음성 확인 서류를 보내고 아이들의 상태를 지켜보기로 했다.
아이들의 상태가 호전되어갈 즈음, 몸이 스멀스멀 아파왔다. 두통, 근육통, 코막힘, 재채기, 콧물, 5종 세트가 날 괴롭히기 시작했다. 전 날 저녁 8시에 침대에 누워 오들오들 떨며 잠을 청해 다음날 오전 11시까지 침대에 딱 붙어있었다. 그 후유증으로 오늘도 제정신이 아니다.
"엄마는 절대 아프면 안 돼. 아프고 싶어도 아플 수가 없어. 그래 난 엄마니까."
나 스스로에게 말하는 주문 같은 거다. 엄마로 사는 무게가 녹록지 않다. 누가 나보고 엄마 되라고 한 것도 아닌데 난 엄마가 되었고 누가 나에게 엄마는 그래야 된다고 책임을 지어준 것도 아닌데 나는 책임을 져야만 한다. 순간순간 찾아오는 '이별'에 대한 두려움이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하다.
열이 펄펄 나는 아이를 끌어안고 끌어안은 열기 때문에 열이 더 오르면 어쩌나 걱정했다. 그러면서도 엄마 품에 안겨 정서적인 안정과 평안을 누리면서 모든 질병이 싹 달아나는 '엄마 항체'가 아이에게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더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