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다운 일상 탈출
(지난 추석에 쓰고 발송을 안 한 지도 몰랐던 글... 을 이제 업로드하며)
어제저녁 침대의 배게 두 개를 겹쳐 등에 대고, 한 개는 무릎에 놓은 채 책 한 권을 들고 앉았다. 쑤린의 <어떤 게 인생을 살 것인가>, 지난 7월 한국에서 떠나올 때 서점에서 골랐던 두꺼운 양장본의 책이다. 제목에 적힌 "하버드대 인생학 명강의"라는 글에 끌려 하버드 근처도 가보지 못했지만 나도 읽고 딸 별이에게도 잃어보라고 할 요량으로 사 왔다.
와 엄마 이쁘다!
샤워를 하러 들어가기 전 갈아입을 옷을 양손에 들고 풍차 돌리듯 안방을 들어온 요엘은 자신이 남자임을 잘 확인하도록 발가벗은 채 춤을 추고 있었다. 막둥이 모습에 실소가 터졌다. 대체 왜 저러는 거지.
이미 샤워를 마친 다엘이 욕실에서 옷을 갈아입으면서 한 마디 보탰다.
"Huh! She's always beautiful. You know. So you mean she is olny beautiful at the moment? Huh? only today? Awwwwww."
그러니까, 다엘은 엄마는 원래 이쁜데 너는 왜 오늘만 엄마가 예쁘다고 하냐면서 놀리듯 이야기한 거다. 대체 이 오글거리는 대화를 듣고 있자니 실소가 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미소가 지어졌다.
'녀석들 엄마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짜식들.'
초록색 문양이 들어간 잠옷을 입고, 초록색 이불 위에서 빨간색 양장본을 들고 책을 보는 엄마 모습이 지적이어 보였으리라.
종종 훅 들어오는 아이들의 마음이 큐피드의 화살같이 다가올 때가 있다. 워낙 애교가 많은 막내 요엘과 덤덤한 듯 애교는 없지만 늘 엄마가 한 번 더 안아주길, 한 번 더 쓰다듬어 주길 바라는 둘째 다엘. 딸과는 또 다른 감정을 내게 주는 녀석들이다. 둘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투닥거릴 때는 비 오는 날 둘 다 빨랫줄에 매달아 빨래집게로 딱 집어 놓고 먼지 나게 때려주고 싶은 마음도 들지만 아이들 때려 키우지 않으니, 복장 터지는 날 상상에 맡길 뿐이다.
오! 엄마가 컴퓨터 앞에 안 앉아 있고,
거실에 나와 있는 거 되게 오랜만에 본다. 엄마가 쉬는 모습 보니까 좋다.
한국 추석 연휴에 나도 푹 쉬었다. 이곳에은 연휴도 아니고, 일상을 사는 평일이고 어떤 이슈도 없었다. 다만 나는 여유 있게 내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마음이 여유로웠다. 거실 소파에 기대서 책을 읽고, 주방에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고 가능한 책상 앞에 앉아 있지 않으려 했다. 급한 일이 없어서 다행이었고, 글 쓰고 포스팅하고 서평도 쓰고 해야겠다마는 그냥 지금은 내게 주어진 여유를 충분히, 유유자적하게 누리고 싶었다.
일부터 카페에 책 두세 권을 들고 가서 시간을 보내고, 책 한 권과 연필 한 자루 들고 거실과 침대에 엎어져 책을 읽었다. 시간은 느리게 흐르고, 마음은 여유로웠으며 머릿속에는 새로운 생각들로 가득했다.
며칠 전, 별이 학교에서 Toastmasters라는 스피치 대회가 있었다. 가족들을 모두 초대하고 한 테이블에 앉아 그날 스피치에 참여한 아이들은 돌아가면서 각자 자기 가족 한 명씩 소개를 했다. 그리고 주제를 가지고 앞에 나가 연설자가 되어 멋지게 연설을 했다. 별이가 나를 뭐라고 소개할지 궁금했다. 평소에도 사람들에게 "우리 엄마는 작가예요"라고 말하는 통에 그렇게 말하겠거니 하긴 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어떤 아이는 엄마는 음식을 아주 맛있게 만든다고 소개했고, 어떤 아이는 엄마 직업을 말하며 자랑스러워했다. 엄마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자기는 엄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하는 아이도 있었다. 아빠 직업을 말하는 아이도 있었고, 아빠가 얼마나 장난기가 많고 자기랑 잘 놀아주는지 말하는 아이도 있었다. 아빠는 항상 집에서 티브이만 본다고 디스 하는 아이도 있었고 말이다.
별이는 나를 소개할 때 우리 엄마는 작가이고, 항상 방에서 글을 쓰고 강의를 한다고 말했다. 그 말을 하는데 영어로 이야기하니 " always"라는 단어가 무척이나 귀에 거슬렸다. 작가로, 라이팅 코치로, 온라인으로 코칭을 하는 영어 코치로서 너무 당연한 모습이었겠지만, 나는 항상 책상에 앉아 있지 않았고, 항상 글을 쓰지 않았다. 게다가 항상 강의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별이가 볼 때마다 나는 항상 그 시간에 책상에 앉아 있었고, 글을 썼고, 강의를 듣고, 강의를 했고, 코칭을 했다. 그러니 별이 눈에는 나는 '항상 그 일만 하는 사람'으로 보였으리라.
아이들에게 있어서 나는 공부하는 엄마,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엄마, 날마다 발전하는 엄마로 보이고는 싶지만 '시간이 없어서 바쁜 엄마'로 보이고 싶지는 않다. 혹여, 엄마는 바쁘기 때문에 자기들과 함께 할 시간이 없다고 느끼는 게 싫은 마음에서 비롯된 거다.
안타까운 사실은, 나는 늘 바쁜 엄마가 맞다. 내가 해야 할 것은 바쁘지만, 일상에서 하나씩 해치우며 허덕거리는 게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잘 소화시켜 차근차근 여유롭게 해 나가는 거다. 그 와중에 엄마로서의 역할도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다.
여하튼 과도한 칭찬을 들은 날, 어쩌면 녀석들이 인생 사는 방법을 아니 나랑 사는 방법을 나보다 더 잘 아는지도 모르겠다. 내일 맛있는 음식 해줘야겠다.